[뻔하거나 Fun하거나] ‘500만 돌파’ 킹스맨, 삐딱하게 좀 보겠습니다

입력 2015-03-21 13: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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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킹스맨’이 500만 관객을 돌파했다. 19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는 누적관객수 501만 6397명을 기록하며 37일 만에 500만 고지를 돌파했다. 역대 청소년관람불가 영화 중 5위다. ‘킹스맨’은 순위 기록 뿐 아니라 수익 부분에서도 한 몫하고 있다. 지금까지 3532만 달러(한화 400억 원)을 벌어들이며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입을 거두고 있다.

‘킹스맨’이 한국 관객에게 사랑 받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액션 스파이물의 긴박감 속에서도 B급 유머와 세련된 유머가 어우러진 점이 가장 클 것이다. 또한 그동안 조용한 영국 신사인줄만 알았던 콜린 퍼스의 생애 첫 ‘수트 액션’은 54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화려했다. 게다가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 Makes Man)라는 명대사를 멋스런 영국발음으로 남겼으니 여성 팬들의 마음이 흔들거릴 수 밖에 없다.

필자도 영화를 무척 잘 봤다. 콜린 퍼스의 팬이었을 뿐더러 지난해 이십세기폭스코리아에서 보여준 2015년도 라인업 중 ‘킹스맨’ 예고편 영상을 봤을 때 무릎을 탁 쳤을 정도였다. 그리고 전체를 펼쳐봤을 때 상당히 괜찮은 작품이었다. 병맛 같은 유머인데 영국 신사의 정장과 화려한 비주얼의 조화가 흥미로웠다. 오락성이 짙은 이 영화가 어느 정도 흥행을 할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마음 속으로 찝찝함은 지워지지 않았다. ‘대량 학살’에 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극중 지구온난화를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인간들이 존재하는 한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없음을 알게 된 한 악당이자 벤처사업가가 ‘대량 학살’이라는 방법을 택했다. 무료로 인터넷과 전화 등 모든 망(Network)을 사용할 수 있는 칩을 사람 몸에 심어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는 때에 모두가 한꺼번에 죽을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것이다. 물론 선택 받은 이들도 있다. ‘대량 학살’을 위한 계획에 막대한 투자를 건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량 학살에 영향을 받지 않는 칩을 받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킹스맨’은 이를 막고자 이 일에 투입된다. 극의 결말은 결국 주인공인 ‘에그시’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그들이 말하는 ‘정의’를 구현한다.

극중에서 두 번의 대량학살 장면이 나온다. 한 번은 악당의 음모다. 그의 ‘무료 칩’을 시험해보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이용한다. 칩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갑자기 분노하며 서로를 죽이기 시작한다. 여기에 끼게 된 콜린 퍼스 역시 ‘장도리 액션’을 펼친다. 리녀드 스키너드의 ‘프리 버드’ 음악이 흘러나오는 이 장면은 긴장과 웃음을 동시에 유발해낸다. 또 다른 장면은 부자와 권력자들이 몰살되는 장면이다. 에그시가 대량학살을 막기 위해 발상의 전환을 펼쳐 오히려 반대로 그들을 죽이고자 했던 이들의 머리를 폭발시킨다. 엘가의 ‘위풍당당행진곡’이 나오며 권력자들의 머리가 하나씩 형형색색으로 터진다. 끔찍해질 수 있는 장면을 B급으로 커버하며 관객들에게 웃음을 준다. 사람들을 죽이고자 했던 이들의 머리가 차례대로 하나씩 터질 때마다 관객들은 깔깔대며 웃는다.

이 장면을 보며 필자 역시 웃음을 터트렸지만 반대로 참 무서운 포장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람들의 머리를 폭발시킨 매튜 본 감독의 의도는 뭘까. ‘킹스맨’은 대량학살은 막았지만 모두의 희생을 막을 순 없었다. 아니, 막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죽이기로 선택했다. 참으로 무서운 생각이 아닌가. 관객들이 권력자들의 죽음을 통쾌하게 쳐다봤을 땐 우리는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우리를 먼저 죽이려 했기에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환경과 조건을 배제한 채 따져보자.

매튜 본 감독은 다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은 감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잠정적 결론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다. 영화는 계속해서 ‘정의’를 외치는 데 말이다. 우리가 과연 생명의 가치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까. 있는 자나 없는 자나 생명의 가치는 똑같고 인간은 누구를 살려야하고 죽여야하는지 판단할 권리는 없다. 그들이 얄미운 부자임에도 말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결정을 화려한 색상과 음악으로 포장시켰던 감독의 연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재미있게 보라고 만든 영화였겠지만 마냥 웃으며 볼 순 없었다.

동아닷컴 조유경 기자 polaris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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