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선수’ 김인식, 아픔의 땅 도쿄서 한 풀었다

입력 2015-11-23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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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어12 야구대표팀 김인식 감독. 스포츠동아DB

■ 우리가 몰랐던 ‘선수’ 김인식

강병철 “고교 때 손가락 안에 드는 투수”
1967년 아시아선수권 부상 이후 내리막
48년 만에 감독으로서 세계 정상에 올라


‘2015 WBSC(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 프리미어 12’에서 우승을 지휘한 김인식(68) 감독에게는 ‘국민감독’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요즘 팬들에게 그는 ‘영원한 감독’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그도 야구선수 출신이다. 그렇다면 ‘선수 김인식’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 중학교 2학년 때 야구 시작한 늦깎이 천재

김인식 감독은 서울 토박이다. 1947년 성북구 동소문동 5가 1번지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삼선초등학교 근처다. 돈암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그는 그저 동네야구를 즐기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야구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바로 인근에 ‘야구 명문’ 경동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동고는 당시 강타자 백인천에다 ‘원자탄 투수’로 이름을 날린 이재환, 최고의 3루수 오춘삼 등이 주축이었는데, 이들이 3학년 때 국내무대에서 32연승(2무 포함)을 기록할 정도로 천하무적이었다. 김 감독은 당시를 떠올리며 “경동고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그 근처가 야구로 떠들썩했다. 경동중에서 야구를 하는 친한 형들도 있어서 친구들이 개천가에서 동네야구를 참 많이 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한 것은 다소 늦은 나이인 배문중 2학년 때였다. 그러나 그는 단숨에 천부적 소질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야구 입문 1년 만인 배문중 3학년 때 대한체육회에서 종목별로 시상하는 연식야구 부문 ‘올해의 선수’ 수상자가 됐다. 당시 중학교는 말랑말랑한 공을 사용하는 연식야구를 하고, 고교부터 지금의 딱딱한 공을 사용하는 경식야구를 했다. 김 감독은 이에 대해 “부산 대신중학교에 다니던 강병철이 야구 잘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난 강병철이 받을 줄 알았는데 내가 그 상을 받았다”며 웃었다.


● 배문고 에이스에서 실업리그 신인상 두각

배문고는 투수 김인식 덕분에 그 시절 전국 강호로 떠올랐다. 특히 고교 3학년이던 1964년 화랑대기에서 김인식은 맹활약했다. 1회전에서 마산상고에 5-1 완투승, 2회전에서 경남상고에 5-0 완봉승을 거뒀다. 준결승전에서 경남고에 5-1로 이긴 김인식은 동대문상고와의 결승전에 등판했지만 팀이 0-3으로 패하면서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러나 김인식은 대회 감투상을 받을 정도로 투혼을 발휘하며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우완투수였던 김인식은 고교를 졸업한 뒤 1965년 실업팀 크라운맥주(한일은행 전신)에 입단해 신인상을 받을 만큼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크라운맥주는 4번타자 김응룡이 포진한 타선도 막강했지만, 전년도 다승 1위 신용균과 방어율 1위 김영덕 등 재일교포 원투펀치가 실업무대를 평정할 만큼 압도적 마운드를 자랑했다. 그런 팀에서 김인식은 데뷔하자마자 곧바로 팀 마운드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고, 그해 8월 열린 올스타전에 선발돼 1차전 우수투수상을 받기도 했다.

김인식 감독은 그 시절을 회상하며 “잘하는 투수는 아니었고, 신인상을 받으면서 ‘앞으로 조금 희망은 있겠구나’ 하는 정도의 투수였다”고 겸손해했다. 그러나 크라운맥주 입단 동기인 강병철 전 롯데 감독은 “크라운맥주에 입단했을 정도면 고교 시절 손가락 안에 드는 특급투수였다는 뜻”이라며 웃더니 “요즘으로 얘기하자면 신인투수가 김영덕, 신용균 선배 다음으로 곧바로 3선발 자리를 꿰찼다. 오버핸드 투수였는데, 투구폼이 예뻤고, 컨트롤이 정교했다. 1루 견제도 아주 잘하는 투수였다. 강속구 투수는 아니었지만 커브와 슈트(역회전볼)가 좋았다”고 소개했다.


● 어깨 부상으로 조기 은퇴한 불운의 투수


너무 일찍 꽃을 피웠기에 빨리 시들었을까. 선수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67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아선수권대회 때 그는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에 선발돼 태극마크를 달았지만, 갑자기 어깨가 아팠다. 속으로 ‘괜찮겠거니’ 했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투수 생명에는 그때 적신호가 켜졌다.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해병대에서도 어깨 통증에 시달리던 그는 한일은행(크라운맥주 후신)에 복귀했지만 이렇다할 활약을 하지 못했다. 결국 1972년(만 25세)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하는 비운을 맛봤다. 김인식 감독은 “어린 나이에 좀 많이 던지면서 무리를 했던 것 같다”며 “요즘은 팔꿈치 인대접합수술도 하는 시대지만, 당시엔 스포츠의학이 뒤떨어졌다. 요즘 같으면 아무 것도 아닌 부상일 수 있는데 당시엔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돌이켰다.

그래서 그동안 도쿄의 기억이 그리 좋을 리 없었다. 처음 태극마크를 달고 나섰던 1967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어깨 부상의 신호를 안겨준 곳이었으니…. ‘천재 투수’이자 ‘비운의 투수’였던 김인식은 결국 그 회한의 장소, 도쿄에서 48년 만에 가슴 속에 맺혀 있던 응어리를 풀었다. 국가대표 감독으로 당당히 세계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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