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마을①] 구불구불 뱀골재, 평안 지킨 지혜의 고갯길

입력 2016-03-08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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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고흥군 동강면에서 보성군 벌교읍을 향해 굽어 내리는 뱀골재. 그 가운데 마치 분지처럼 팬 곳을 고흥군 동강면 한천리 신촌마을 강대호 이장은 “어린 시절 지나다닐 땐 숲으로 컴컴했다”면서 뱀골재에 얽힌 구전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스포츠동아DB

■ 고흥군과 함께하는 이야기가 있는 마을


● 2. 동강면 한천리 신촌마을 뱀골재

세밀한 생활사와 풍속사 혹은 세상의 어긋난 도리에 대한 풍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동안 윤색과 와전의 과정을 거치기도 하지만 그나마도 이야기를 낳은 공간에서 나고 자란 어르신들의 입이 아니라면 들을 수 없다. 콘텐츠로서 다양한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 본래의 설화를 들여다보는 까닭이다. 넘쳐나는 대신 그만큼 사라져가는 진정한 스토리텔링 콘텐츠로서 설화의 가치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전남 고흥군은 땅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반도의 토양 위에서 먼 옛날부터 이야기가 풍성했던 곳이다. 조선시대 류몽인이 이 곳에서 ‘어우야담’을 쓸 수 있었던 한 배경이기도 하다. 웹툰과 애니메이션, 영화와 드라마 등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의 또 다른 원형일 수도 있을 고흥의 설화를, 스포츠동아가 매월 격주 총 20회에 걸쳐 연재한다.


죄지은 이들 지날 땐 뱀 나타나 응징
마을 지키는 ‘고흥의 관문’ 같았던 곳

동강면과 벌교읍 경계 ‘장승배기’엔
딸과 사위에 목숨 잃은 소 장수 설화도


사람들은 새롭게 길을 텄다. 몇 구비로 굽은 데다 급하게 경사를 이룬 원래의 고갯길을 피해가기 위해서였다. 그 정도가 오죽해 조정래 작가는 “구불거림은 행인들의 짜증을 일으킬 정도로 심했다”고 했을까.(‘태백산맥’) 더욱이 숲으로 우거진 당초의 길은 낮에도 들어서기를 저어하게 했다. 그렇게 새로 난 길은 오랜 시간, 샛길로 통했다.

샛길은 2013년 6월 폭 9.5m, 길이 940m의 왕복 2차선 도로로 말끔해졌다. 전남 고흥군 동강면 한천리 고흥나들목 교차로에서 보성군 벌교읍 추동리 추동삼거리까지 이어지는 채동선로의 고흥나들목∼벌교읍 장좌리 장좌육교 교차로 구간이다. 고흥에서 벌교나 순천으로 가려는 이들과 고흥나들목을 향하는 벌교 사람들의 발걸음은 그렇게 빨라졌다.

굴곡과 급경사로 인한 사고의 위험성은 물론 좁은 폭으로 늘 교통체증에 시달린 옛길은 ‘위험도로’가 되어 이 같은 ‘구조개선사업’의 대상이 됐다. 이후로 이 길 위에서 사람들과 차량의 통행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그저 채동선로의 우회도로쯤으로 보일 뿐이다.

“부정을 막아주는 지혜로운 고개”

그래도 사람들은 예부터 예사롭지 않게 여겼다. 지나기엔 불편했지만 그 길이 아니면 드나듦이 원활치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반드시 거쳐야 했던 길이다.

뱀골재. 길이 800m가 채 되지 않는 구불구불한 고갯길은 뱀의 모양을 닮았다 했다. 길을 안내한 한천리 운동마을 송영철(78) 할아버지는 “구불구불 뱀처럼 생겼다 혀서, 사동치(蛇洞峙)라고도 혔지”라고 일러주었다. 실제로 1919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지명 등을 조사해 만든 ‘조선지지자료’에도 같은 설명이 담겼다.

사실 뱀과 관련한 지명은 전국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부터 뱀을 사악함과 두려움의 대상이자 다산과 지혜로움의 상징으로 받아들인 때문이다. 특히 뱀을 흔히 접할 수 있는 농경문화의 역사가 더욱 깊은 전남에 이 같은 지명이 많다는 전라남도의 조사 결과도 있다.

하지만 고흥의 뱀골재가 안겨주는 의미는 더욱 유다르다. 뱀골재에는 고흥을 드나드는 수많은 이들 가운데 부정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스며 있다. 원한으로 세상을 떠난 여인의 환생인 뱀은 이 길 위에서 부정과 죄악을 단죄하는 지혜로움의 존재였다. 또 행정구역상 보성군 벌교읍에 속하지만 고흥 사람들이나 벌교 사람들은 이 길을 고흥의 관문처럼 받아들인다.

송 할아버지는 뱀골재에 함께 나선 한천리 신촌마을 강대호(63) 이장을 가리키며 “이 양반 선친이 큰 과수원을 혔는디, 과객이나 괴나리봇짐 장수들이 하룻밤 자고 가기도 혔어요. 아마 뱀골재 설화는 그 사람들이 기냥 밥만 얻어묵고 갈 수 없응께, 그런 이야기를 더 재밌게 보태고 더한 것이라고 보는 거요”라고 말했다.

고흥 방면에서 바라본 뱀골재의 모습. 오른쪽으로 고흥과 이웃한 벌교읍의 풍경이 보인다. 스포츠동아DB



● 역사의 아픔과 문학의 형상화 공간

송 할아버지는 실제 고흥의 ‘관문’은 고흥과 군산을 잇는 우주항공로(국도 27호선)의 고흥군 동강면과 벌교읍 장좌리 경계라고 설명했다.

“장승을 세워 놔서 장승배기라 했어요. 원님이 지나다니고 했지.”

이 곳에서도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동강면 인근 남양면의 소장수가 전대를 찬 채 벌교장에 다녀오다 ‘존속살해’ 당한 것이었다. “여그에 주막이 많았는디, 주막을 하던 딸이 아버지를 죽여불고 돈 찾읍시다”며 남편을 꼬드겼다. 사위는 망설임 끝에 장인을 살해했다.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던 아들이 결국 누이의 집을 찾았다. “으디 딴데로 가셨능가보다”며 딸은 모른 척한다.

“아! 지가 죄가 있응께, 닭 한 마리 잡아가지고 대접하려 사위가 닭의 목을 확 비틀고 있응께, 이를 본 일곱 살 묵은 아가 ‘할아버지에게 그런가모냥 그래부네’라고 말한 거요.”

송 할아버지는 “처갓집 재산을 넘겨다보는 건 사위가 아니라 딸인 거여”라며 허허 웃었다.

도로는 1920년대 일제가 고흥의 쌀 등을 군산 등으로 옮겨간 수탈의 길이기도 하다. 채동선로 역시 마찬가지. 일제는 간척사업으로 고흥과 벌교 등 남도의 바닷물을 막고 땅을 넓혔다. 또 조선총독부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내세워 벌인 토지조사 등으로도 무수한 땅을 빼앗았다. 조선인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해 파탄의 절망에 내몰렸다.

소설 ‘태백산맥’은 뱀골재의 이런 아픔을 그렸다. 몰래 땅을 처분한 지주를 찾아가 먹고 살게 해달라며 애걸하다 결국 삽으로 그를 내리친 소작농의 길, 그 현장을 허위로 증언한 머슴에게 경고하려는 빨치산이 넘어간 길이다.

그 고통을 더욱 아프게 드러내려는 것일까. 뱀골재를 아우른 야산 곳곳에선 무덤이 눈에 띈다. 항간은 ‘공동묘지’라 하지만, 실상 관리자는 무덤의 후손들이다. 강 이장은 “일반적인 묘원공원 같은 곳은 아니지요. 그 시절 주인 없는 땅처럼 여겨 이 곳에 묻은 거요”라고 말한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의 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상당수 무덤 속에 누워 있다. 좌우의 무참한 폭력에 희생당한 벌교 주민들이다. ‘태백산맥’은 전쟁이 터진 직후 국민보도연맹 예비검속을 명분으로 자행된 학살의 피해자들이 “어둠보다 더 진한 죽음의 공포였고 절망” 속에서 “순식간에” 사라진 곳이라고 말한다. 이후 그 가족들은 “새롭게 복받치는 서러움으로 눈물 쏟으며 서로 다투어 흙을 파헤치”며 시체를 찾아 나섰다. 이는 또 다른 보복의 자행으로 이어지는, 참사와 참사의 악순환이었다.

“죄를 짓고 살지 말라”

그 고통과 비극의 악순환 속에서 ‘태백산맥’의 지식인 김범우는 신비로운 시선으로 저 멀리 첨산을 바라보기도 했다. 첨산은 고흥군 동강면 한천리와 매곡리를 나누며 뾰족하게 서 있다. 해발 313m의 첨산은, ‘태백산맥’에 따르면 “거대한 세모뿔”이다. “산은 으례 줄기가 있기 마련이고, 그 줄기를 따라 크고 작은 봉우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첨산은 그렇지가 않았다. 양쪽에 아무 줄기도 거느림이 없이 혼자 우뚝 솟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과 경계를 짓고 있는 양쪽 능선은 흡사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직선으로 뻗어올라 봉우리에서 만나고 있었다”며 조정래는 설명했다.

강 이장은 “고흥을 지켜준다는 수문장 같은 곳이지요”라며 우뚝하면서도 험하고 뾰족하게 솟은 첨산을 가리켰다. “낙안(순천)에서 보면 그 모냥이 붓술처럼 생겨서인지 이 곳에선 필봉이 나온다는 말도 있지라”고 송 할아버지가 말을 보탰다.

두 사람의 말처럼 뱀골재 고갯마루에서 저 너머로 훤한 첨산은 여전히 고흥을 내려다보며 날카로운 시선을 지키고 서 있는 듯하다. 사악하고 부정한 이들을 막고 절대 거짓과 죄를 지으며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뱀골재의 뱀처럼, 식민과 파탄의 고통, 원치 않는 이념의 소용돌이를 뚫고 나온 것처럼. 그리고 이제는 지난 아픔에서 헤어 나와 우뚝 위로 솟아 필봉의 일필휘지와도 같이 길고 밝게 내뻗으리라는 고흥의 앞날을 지켜주려는 것처럼.

고흥(전남)|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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