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길의 스포츠에세이] 유소년축구에서 길을 찾는 차범근의 집념

입력 2017-07-28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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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소년 축구상과 축구교실 운영은 축구인 차범근의 평생 사업이고 차범근의 인생이다. 차범근의 환한 미소에서 밝은 오늘과 내일의 희망이 엿보인다.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1970~1980년대 TV나 라디오를 통해 국제대회의 축구경기 중계방송을 시청 또는 청취한 사람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해설자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아마도 ‘골 결정력 부족’과 ‘문전처리 미숙’이라는 사실을.

한국축구가 중요한 순간마다 골 결정력이 부족해 팬들을 허탈하게 만들거나, 골문 앞에서 허둥대다 짜증을 유발시킨 게 어디 한두 번이랴. 지금도 가끔씩은 귓등으로 들리긴 하지만, 개인적인 느낌인지는 몰라도 그때는 유독 그런 탄식이나 꾸지람이 심했던 것 같다.

이는 정말 고치기 힘든 숙제였다.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공격수 차범근도 같은 고민을 했다. 그래서 그는 독일 무대로 진출하면서 한국축구의 어려운 숙제를 해결할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컸다.

“왜 우리 축구는 매번 문전에서 찬스를 놓쳐 비판을 받는가, 우리도 좋은 축구를 할 수 없을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다. 독일에 가면 그 해답을 찾는데 도움이 될 만한 특별한 것을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선수 시절 차범근.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차범근은 독일생활 10년 동안 한국축구가 나아갈 방향을 많이 연구했다. 그리고는 기어코 해답을 찾았다. 유소년축구에 대한 투자, 그게 그토록 찾아 헤맸던 열쇠였다. 어릴 때부터 공을 가지고 놀 줄 알아야 축구감각이 생긴다. 그런 감각은 성장한 뒤에 훈련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차범근은 한국축구의 근본 문제를 여기에서 찾았던 것이다.

“해답은 간단하다. 어려서 공을 가지고 놀았던 감각, 그런 게 우리는 없었다. 독일은 어려서부터 그런 기본기를 잘 가르쳤고, 한국은 그러지 못했다. 그게 원인이었고, 그게 해답이었다.”

해답을 찾은 차범근은 일찌감치 유소년축구에 눈을 돌렸다. 그게 한국축구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작한 게 바로 축구상과 축구교실이다. 어린 선수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자신감을 심어준 차범근의 일생일대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돈을 내서 축구교실 만들었고, 자기 돈을 내서 장학금을 줬다. 이렇게 선뜻 나선 이유는 단 하나다.

후배들이 좋은 환경에서 축구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차범근은 현재 독일에 머물고 있다. 올해 축구상 수상자 11명과 대한축구협회 추천선수 3명으로 구성된 ‘팀 차붐’을 이끌고 7월 19일부터 말까지 독일 분데스리가 클럽 산하 유스팀과 원정경기를 갖고 있다. 이는 일생을 통해 추구하는 유소년축구에 대한 사랑을 실천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차범근이 축구생애를 통해 벼르고 있는 축구상과 축구교실의 출범 배경과 추진 과정, 그리고 현황을 살펴보면 과거와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의 차범근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본 칼럼의 인터뷰 내용은 논문 ‘축구인 차범근 생애사 연구’(2017)에서 발췌했음).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 어려울 때 힘이 되는 축구상

차범근이 현역 은퇴를 앞둔 시점인 1988년, 소년한국일보의 김수남 사장이 독일 레버쿠젠 차범근의 집을 찾았다. 유럽에 온 김에 만나러 간 것이다. 김 사장은 그 자리에서 ‘당신이 아이들의 영웅이고 꿈인데, 당신의 이름을 딴 상을 하나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차범근은 “김 사장님은 아이들을 무척 사랑하는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은퇴 이후에 한국축구, 특히 유소년축구에 기여하고 싶었던 터여서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고 판단해 흔쾌히 허락했다. 독일에서 어느 정도 돈을 모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축구상 시상이 가능하다는 판단도 섰다. 그렇게 탄생한 게 축구상이다. 차범근은 상이 어린이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 지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1972년 백상체육대상 신인상을 탔어. 축구선수로 처음 받은 상이었지. 그때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어. 상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인정을 받는다는 기분이고, 이것은 굉장한 자신감이야. 내가 한 것에 보상을 받는 것이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겠는가. 내가 신인상을 받아보니까 그 상은 선수에게는 힘이자 꿈이고 용기였지. 아울러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주는 게 상이라고 생각했어. 선수생활을 하다보면 항상 좋을 때만 있는 게 아니야. 어려울 때나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지. 이 때 이 상이 나를 다시 회복시켜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동기유발도 되고. 그 상을 생각하면 가라앉다가도 다시 일어서. 자기를 찾는데 굉장히 좋은 게 바로 상이야.”

축구상은 차범근이 분데스리가 레버쿠젠에서 현역선수로 뛰던 1988년 처음 만들어졌다. 이후 2017년까지 단 한번도 거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이동국(4회), 박지성(5회), 기성용(13회) 등이 수상하는 등 29년간 총 179명을 배출했다. 처음에는 전국 초등학교 선수들 중 훌륭한 기량을 발휘한 선수 6명을 선정해 상을 줬지만 시간이 갈수록 규모를 키워왔다.

제28회 차범근 축구상 대상 수상자 서재민.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눈여겨볼만한 점은 선정기준에서 당장의 성적도 중요하겠지만, 앞으로 커나갈 장래성을 고려했다는 점이다. 가능성이 평가 항목에 포함된 것이다.

학교생활이나 활동, 성품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점도 돋보인다. 축구상을 받기 위해서는 축구를 잘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성도 좋아야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축구상은 나 혼자의 생각으로, 나 혼자의 힘으로 만든 게 아니야. 우리 선배님과 선생님들과 함께 만든 거지. 선생님들이 칭찬해준 것들, 선배님들이 가르쳐줬던 것들, 보여줬던 것들, 이 모든 것들이 거름이 됐고, 그게 축구상을 만들게 된 동기였어. 세상은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절대 아니야. 그 분들은 스스로 만들고 싶어도 재정적으로 할 수가 없었던 거야. 한국축구를 위해서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그걸 내가 사명감을 갖고 시작했던 거지.”

자신의 경험을 통해 확신을 가졌던 축구상은 어린 선수들의 심리상태를 끌어올리기 위한 디딤돌이라고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칭찬을 들으면서 힘을 냈던 기억, 백상체육대상 신인상을 받으면서 자신감을 얻었던 기억들이 축구상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학생시절 때 소속팀 감독에게 들었던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선수’라는 칭찬은 어른이 된 차범근의 시선을 유소년으로 돌려놓은 촉매제라고 할 수 있다. 축구교실에서 대회를 할 때마다 항상 모든 선수들에게 메달을 주고 격려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동기유발. 그 것이 축구상의 핵심 가치다.

사진제공|차범근 축구교실



● 한국축구의 질적 변화를 꾀한 축구교실

차범근이 처음 축구교실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한 때는 1978년이었다. 당시는 축구교실이라는 개념도 희박했고, 어린이를 통한 축구의 미래를 내다본 축구인도 드물었던 시절이다. 그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 계기는 1978년 재팬컵에서 본 일본 어린이들의 모습이었다. 당시 경기 사이의 막간을 이용해서 일본 어린이들이 공을 들고 운동장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차범근은 그 장면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때 이미 일본축구는 미래를 내다보고 체계적인 어린이축구교실을 전국적으로 시작한 때였다.

차범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축구만큼은 일본에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언젠가는 우리가 저 아이들에게 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분데스리가에서 활동할 때에도 시즌이 끝나면 국내로 들어와 항상 어린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쳤다. 누가 시킨 게 아니었다. 돈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후배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린이에 대한 투자만이 한국축구가 살 길이라는 확신이 없었으면 이 같은 행동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축구교실이 한국축구를 개선할 수 있는 모델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1990년 서울 구로구, 은평구, 용산구 등 3곳에 축구교실을 열었다.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 지역인 구로구와 은평구를 찾은 건 자신도 어렵게 축구를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 훈련 프로그램은 성인과 다르기 때문에 연령별로 교육프로그램을 따로 만들었다.

사진제공|차범근 축구교실


차범근은 “학창 시절 축구할 때 공이 자꾸 떴는데, 이를 제대로 잡아줄 사람이 없어 답답했다”고 했다. 혼자서 이리저리 궁리를 했지만 뚜렷한 해답을 찾지는 못했다. 국가대표팀에 들어가서는 코칭스태프에게 지도를 많이 받았다. 심지어 독일진출 전까지도 기본기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기본기를 다지고 강화할 목적으로 대표팀 코칭스태프를 찾아가서 배웠고 그 덕분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고 했다.

차범근은 축구교실의 역할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했다. 학창시절 그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배울 수 있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공부를 안 시키는 문제, 돈을 걷는 문제, 훈련을 너무 많이 시키는 문제 등을 한꺼번에 해결한 곳이 바로 축구교실이야. 방과 후에 축구를 했고, 연령별 훈련을 했고, 무료로 가르쳤고, 일주일에 3일 훈련 및 1시간 이상 훈련을 하지 않았지. 훈련방법을 개선하면서 공에 대한 적응력이나 기본기 등 기술적인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지. 물론 이런 방법으로 당장 눈앞에 성과가 나오지는 않아. 사람들이 비웃을 수도 있지. 하지만 굴하지 않았어. 대신 10~15년 후면 성과가 나타날 것이고, 프로구단들도 연령별 시스템을 갖출 것이라고 확신했어.”

축구교실의 요체는 운동과 공부를 병행했다는 점, 연령별 훈련프로그램을 짜고, 훈련량을 알맞게 조절했다는 점이다. 차범근은 축구교실을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생각했다. 특히 학원스포츠가 주축인 한국적 특성에 맞는 연계된 시스템이 필요했다. 축구교실 선수들이 진학을 할 경우 훈련을 연속적으로 할 수 있는 기반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영역을 넓혀나갔다. 결국 초등~중등~고교~대학으로 이어진 연계된 축구교실의 체계를 완성할 수 있었다. 프로구단 감독을 맡으면서도 유소년축구에 관심을 기울이며 구단에 투자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축구교실을 시작한 지 20년이 되던 2010년, 자신의 메시지가 충분히 전달됐다고 판단하고는 학교의 축구교실은 따로 떼어주고, 유소년축구교실 운영에만 전념해왔다.

사진제공|차범근 축구교실



● 축구상과 축구교실은 차범근 인생 그 자체

차범근은 언제나 새로운 꿈을 꾼다. 현재에 만족하거나 머물지 않는다. 그게 차범근 정신이다. 축구상과 축구교실도 새로운 변신을 꿈꾸고 있다.

경기도 연천에 차범근 가족 명의의 땅이 있다, 여기에 축구교실이 운영할 운동장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센터 건물과 함께 체육관 등도 짓는다. 이는 그의 평생의 사업이다. “운동장을 갖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다. 축구교실은 유소년클럽축구의 초석이고 도약의 밑거름이다. 어릴 때부터 꿈꾸었던, 우리의 운동장에서 선수를 배출하고, 성공의 기회를 많이 만들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축구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건강한 사람을 많이 배출하는 것 또한 그가 바라는 바다.

축구상은 올해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했다.

IT 기업 카카오가 후원하면서 규모는 더 커졌다. 시상 영역을 확대해 베스트11 방식으로 개편됐다. 그동안 공격수가 대부분이었지만 확대개편을 통해 전 포지션의 선수들을 격려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더 큰 계획을 세웠다. 유럽으로 나가 선진축구의 유망주들과 직접 부딪혀보게 하는 것이다. “국제경험을 쌓게 해주는 게 또 다른 목표인데, 내가 청소년대회를 갔다 오니깐 엄청 성장했다는 것을 느꼈어. 시야도 넓어지고, 기술도, 경기력도 좋아졌지. 다른 선수들과 차이가 많이 났어.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그런 국제적인 경험을 쌓게 해주고 싶은 거야.”

차범근이 현재 축구상 수상자들을 이끌고 독일에서 친선경기를 하고 있는 이유다. 풍부한 경험을 통해 한국축구를 이끌 엘리트 선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추진한 일이다. 차범근은 축구상과 축구교실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이건 평생 해야 하는 일이고, 차범근의 인생이야.”

최현길 기자 choihg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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