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을 내다본 기업인으로 평가받는 故 최종현 SK 선대 회장의 타계 20주기를 맞아 SK그룹은 24일 서울 워커힐호텔 비스타홀에서 경영철학을 재조명하는 행사를 개최한다. 사진은 최종현 선대 회장의 생전 모습. 사진제공|SK그룹
준비·실행력 탁월…인재제일주의
직물회사를 석유화학 그룹으로 육성
투병 중에도 나라 미래 걱정한 어른
“미래는 도전하는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대한한국을 ‘무자원 산유국’으로 만들고,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의 기반을 다진 고(故) 최종현 SK 선대 회장이 26일로 타계 20주기를 맞는다. 최 회장은 ‘늘 10년을 내다본 기업인’으로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꿈을 현실로 이뤄냈다. 전경련 회장 시절인 1997년에는 폐암 투병으로 산소호흡기를 꽂은 상황에서도 외환위기 극복 방안을 논의하는 등 늘 국가를 걱정했던 기업가이기도 했다.
● 한국을 ‘무자원 산유국’으로
최 회장은 치밀한 준비와 실행력을 갖춘 ‘지성’과 ‘패기’의 기업가였다. 그가 1973년 “선경(현 SK)을 세계 일류 에너지·화학 회사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밝혔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불가능한 꿈’으로 치부했다. 당시 선경은 에너지·화학 산업에 도전하기엔 자본과 기술력이 부족한 섬유회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 회장은 중동지역 왕실과의 네트워크 구축 등 치밀한 준비 끝에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를 인수했고, 1983년부터는 해외유전 개발에 나섰다. 주변에서 성공확률이 5%에 불과하다며 만류했지만, 1984년 북예멘 유전개발에 성공했다. 대한민국이 무자원 산유국 대열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는 그룹 총수의 역할을 ‘미래 설계’라고 봤다. 산업동향 분석을 위해 1984년 미국에 미주경영실을 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이후 정보통신 분야를 새 성장동력으로 삼았고, 1994년 한국이동통신 민영화에 참여해 이동통신 산업에 첫 발을 뗐다. 그 때도 주당 8만원 대였던 주식을 주당 33만5000원에 인수하기로 하자 주변에서 재고를 건의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최 회장은 “앞으로 회사 가치를 더 키워가면 된다”고 설득했다.
최 회장의 경영 DNA는 장남 최태원 회장에게로 이어졌다. 최 선대회장이 SK를 직물회사에서 석유화학과 정보통신을 아우르는 그룹으로 키웠다면, 최태원 회장은 하이닉스 인수 등을 통해 반도체와 바이오 등으로 영역 확장을 꾀했다.
● 사재 털어 인재 육성
최 회장은 늘 나라의 미래를 걱정했던 경제인이기도 했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10월 폐암 수술을 받았음에도 산소호흡기를 달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 비상조치를 호소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자원 빈국이지만 인재가 많으면 얼마든지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인재를 키우는 데도 앞장섰다. 1974년 사재를 털어 설립한 한국고등교육재단은 44년 동안 약3700명의 장학생을 지원했다. 최 회장은 타계 직전 “반드시 화장하라”라는 유언을 남겨, 장례문화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SK그룹은 최 선대회장 20주기를 맞아 24일 서울 워커힐호텔 비스타홀에서 경영철학을 재조명하는 행사를 가진다.
김명근 기자 dionys@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