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곽승석(왼쪽)-정지석. 사진제공|KOVO
대형 윙스파이커 박준범은 2010~2011시즌 신인왕을 차지했다. 경쟁자는 1라운드 4순위로 대한항공 유니폼을 입은 곽승석이었다. 신인드래프트에서 2,3번 순위의 우리캐피탈과 LIG손해보험에서 각각 박주형, 정성민을 선택하는 바람에 대한항공과 인연을 맺었다. 신영철 당시 대한항공 감독은 “우리에게 그런 행운이 올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고 기억했다.
대한항공은 그 시즌 처음으로 정규리그 1위를 했다. 곽승석 영입효과를 봤다. 신영철 감독은 그래서인지 지금 우리카드 루키 황경민에게 “너의 롤모델은 곽승석이다. 우선 리시브를 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처음 도입된 준플레이오프를 간신히 통과했던 삼성화재와의 챔피언결정전에서 패하지 않았더라면 대한항공의 전성시대는 훨씬 더 빨리 왔을 수도 있었다.
김종민 감독. 스포츠동아DB
● 만일 김종민 감독의 그 선택이 없었더라면
2013~2014시즌 신인드래프트. V리그 남자부 신인드래프트에서 역대급으로 최대어가 몰렸다. 네이밍스폰서 러시앤캐시를 거쳐 신생팀을 창단한 러시앤캐시 베스피드가 경기대학교 3학년 3명을 신인드래프트에 데리고나오면서 만들어진 일이었다. 당시 대학 졸업반 최고선수는 전광인. 승부조작으로 박준범을 포함한 많은 선수들이 연루돼 팀이 와해될 위기에 처하자 이사회에서 한국전력에게 우선지명으로 전광인을 뽑아가도록 특혜를 주기로 했다.
신생팀 러시앤캐시 베스피드는 8명의 우선지명권을 행사했다. 이민규~송희채~송명근~김규민~정성현~심경섭~곽명우~장준호를 지명했다. 2순위 3번째에서야 기존 구단들에게 지명기회가 왔다. LIG손해보험은 사전에 협의가 됐던 손현종을 얼리 드래프트로 받았다. 우리카드는 정민수를, 현대캐피탈은 김재훈을 각각 지명했다. 이제 남은 것은 챔피언결정전에서 대결했던 대한항공과 삼성화재였다. 디펜딩챔피언 삼성화재 신치용 감독은 다른 길을 찾고 있었다.
지명하고픈 자원이 없을 것으로 판단해 송림고의 정지석을 미리 접촉했다. V리그 출범 이후 처음 고등학생이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하게 된 이유다. 배구인 아버지를 통해 가끔씩 새 신발도 선물하면서 사전에 정지작업을 해놓았던 터라 지명에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바로 앞 순번의 대한항공 김종민 감독이 정지석을 지명했다. 그 순간 벌겋게 달아오른 신치용 감독의 얼굴은 잊을 수가 없다. 그 지명으로 V리그의 역사가 달라졌다.
김종민 감독은 “경기를 몇 번 볼 기회가 있었는데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앞에서 필요한 선수가 빠져나가 기회가 오면 찍는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대한항공은 그 2번의 지명으로 곽승석-정지석 V리그 최강의 WS듀오를 탄생시켰다.
대한항공 곽승석(왼쪽)-정지석. 사진제공|KOVO
● 로마의 역사처럼 곽승석-정지석 듀오는 시간과 노력이 만든 결정체
곽승석~정지석 듀오가 처음부터 완성형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시행착오를 거쳤다. 풍부한 대한항공의 윙스파이커 가운데 선배들의 벽을 우선 넘어야 했다. 수비능력을 입증한 곽승석이 공격에서도 역할을 늘려가며 기회를 잡았다. 정지석은 힘과 경험을 쌓아가면서 출전기회를 조금씩 늘려갔다. 국제대회에 다녀올 때마다 기량이 늘었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성장속도가 빨랐다.
한 자리를 놓고 곽승석과 정지석이 경쟁한 때도, 곽승석이 리베로로 변신해 팀에 도움을 준 때도 있었다. 마침내 박기원 감독 체제에서 대한항공의 윙스파이커 퍼즐은 완성됐다. 두 사람은 2017~2018시즌부터 대한항공의 주전으로 고정되면서 내부 교통정리를 모두 마쳤다. 본격 가동된 이들은 챔피언결정전을 거치면서 기량이 급상승했다.
이번 시즌 이들이 만드는 유기적인 공격과 수비, 리시브는 7개 구단의 사령탑이 모두 최고라고 인정한다. 이들은 가끔 2번의 연결로 상대 블로킹이 따라오기도 전에 득점하는 창의적인 공격까지 보여준다. 정지석은 “연습 때 승석 형과 장난삼아 다양한 플레이를 해보는데 실전에서도 기회가 오면 주저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선수의 안정된 연결도 이들의 빠르고 상상력 풍부한 공격능력을 높여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몇 년째 함께 플레이를 하면서 다져진 두 사람의 호흡은 갈수록 더 좋아지고 있다.
대한항공 정지석. 스포츠동아DB
● 정지석이 깜짝 놀랄만큼 연봉을 더 받은 이유
지난 25일 대한항공에 0-3으로 완패당한 삼성화재 신진식 감독은 “무엇 하나 해볼 것이 없었다. 상대가 너무 잘했다”면서 곽승석-정지석 듀오의 활약을 인정했다. 박기원 감독도“이번처럼만 한다면 어느 팀도 우리를 이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이들의 절묘한 공수능력은 정점에 있다. 이번 시즌 뒤 FA선수가 되는 정지석은 커리어하이 기록을 향해 나간다.
대한항공은 시즌을 앞둔 연봉협상 때부터 내년의 FA협상을 대비했다. 정지석이 “왜 이렇게 연봉을 더 주세요?”라고 되물어볼 정도로 협상은 쉽게 끝났다. 구단이 선수의 요청액 이상으로 더 준 V리그의 드문 사례였다.
당시 정지석은 FA 보상선수 커트라인 금액을 감안해 원하는 연봉을 밝혔다. 구단은 그보다 더 많은 돈을 안겼다. 정지석은 구단의 그런 배려에 감사했다. 보상선수라는 1차 울타리를 친 대한항공은 정지석에게 “내년에 FA가 되면 더 많이 줄께”라고 했다. 내년에도 놓치지 않겠다는 사인이었다.
곽승석-정지석 듀오가 번갈아가면서 팀을 이끄는 덕분에 2라운드 전승을 달리는 대한항공은 29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우리카드를 만난다. 2라운드 들어 전혀 다른 팀이 된 우리카드의 상승세를 황금듀오가 어떻게 상대할지 궁금하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