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리의 듀얼인터뷰] ‘국가부도의 날’ 제작자-작가 “유의미한 작품 되길”

입력 2018-11-30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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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베테랑 제작자인 영화사 집의 이유진(오른쪽) 대표와 1985년생 엄성민 작가가 만든 첫 작품이다. “신인이라고 믿겨지지 않는” 글로 이 대표를 사로잡은 엄 작가는 “보고 즐기는 영화로 만든 몫은 대표님의 공”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이미 다음 작품도 같이하기로 손을 잡았다.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 영화 ‘국가부도의 날’ 제작자 이유진 & 엄성민 작가

이유진 제작자
재난영화 플롯으로 푼 IMF에 흥미
1990년대 구현? 사극보다 어려워
엄 작가의 드라이한 감성 마음에 쏙

엄성민 작가
전혀 상상도 못한 뱅상 카셀 캐스팅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잘 쓸걸 후회돼
현실에 뿌리 둔 이야기가 내 스타일


볼 땐 재미있어도 어쩐지 주변에 선뜻 권하기 어려운 영화가 있다. 반면 재미 그 이상의 가치를 담은 작품을 마주할 때면 혼자보기 아까워 주변에 마구 입소문을 내고 싶어지기도 한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후자에 속한다.

시대를 담아내려는 시도가 줄곧 이어지는 최근 영화계에서 ‘국가부도의 날’(감독 최국희·제작 영화사 집)은 좀 더 분명하면서도 미래지향적인 자리를 차지한 작품이다. 그건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다룬 첫 한국영화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20년 전 벌어진 경제위기의 여파가 지금도 지속되는 사회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화두를, 담담하면서도 묵직하게 던지는 작품이기에 그렇다. 무엇보다 탄탄한 시나리오가 없었다면 탄생하기 쉽지 않았을 작품이다.

‘국가부도의 날’은 28일 개봉 당일 30만 관객을 동원, 박스오피스 1위로 출발했다. 이튿날에도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영화가 막 공개된 날 오후 서울 논현동 영화사 집 사무실에서 제작자 이유진 대표와 시나리오를 쓴 엄성민 작가를 만났다.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베테랑 제작자가 시나리오 단계서부터 기획한 작품일 거란 예상과 달리, 이 영화는 엄성민 작가가 영상원(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작품으로 완성한 시나리오에서 출발했다. 1985년생 신인작가가 진지하게 꺼내든 IMF 그리고 당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베테랑 제작자의 눈에 띄었다. 작년 3월의 일이다.


-작품의 시작이 궁금하다.



이유진(이하 이) “우리 영화사 오효진 PD가 어느 날 영상원 졸업작품이라고 읽어보라더라. 제목을 보고 ‘혹시 IMF 이야기니?’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웃음) 단숨에, 재미있게 읽었다. 신인작가가 쓴 게 맞나? 놀라웠다. IMF를 재난영화 플롯으로 풀어낸 게 좋았다.”


-IMF 소재가 제작자에겐 여러 면에서 부담이었을 텐데.


“그렇다. 금융 위기에 대한 영화가 아직까지 없었고, 사실 그 일은 큰 시련이기도 하지 않나. 상처 입은 분들도 많다. 20년 전 일이지만 여전히 고민과 갈등이 남아있다. IMF를 다룬다면 ‘시각’이 중요할 텐데, 그런 면에서 이 시나리오의 시각이 마음에 들었다.”

이유진 대표는 영화사 집을 통해 2007년 ‘그놈 목소리’(297만)를 시작으로 ‘전우치’(606만), ‘감시자들’(550만), ‘검은 사제들’(544만), ‘마스터’(714만) 등 숱한 흥행작을 기획하고 제작했다. 김윤석, 강동원 등 배우들이 ‘믿고 택하는’ 영화사로도 통한다. 반면 엄성민 작가는 ‘국가부도의 날’이 영화계 데뷔작.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뒤늦게 영상원에 진학해 시나리오 작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이전까지 공모전에 당선된 적도, 다른 영화 작업에 참여한 적도 없는 신인이다.


-뒤늦게 영화에 뛰어들었다.


엄성민(이하 엄) “막연하게 영화나 콘텐츠 관련 일을 하고 싶었다. 대학 졸업하고 OO투자배급사 면접까지 봤지만 떨어졌다. 영화가 하고 싶으니까 일단 해보자 싶어서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워크숍부터 경험했다. 수업 몇 번 해보니까 바로 알겠더라. 나는 연출은 아니다(웃음), 쓰는 게 맞구나.”


-학생 때 IMF 소재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IMF 외환외기를 상업영화로 써볼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해왔다. 2016년쯤 시나리오를 준비하던 중 ‘비공식 대책팀이 있었다’는 기사를 봤고, 그게 출발이다. 대학 들어가서 여러 책을 보면서 IMF를 변곡점으로 한국사회가 많이 바뀌었다는 문제의식은 갖고 있었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희미한 생각이었다. 영화로 만들기 위해 다시 공부해보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사회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사람들의 삶도 달려졌다는 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영화는 모두가 경제호황을 믿어 의심치 않던 1997년 11월, 국가부도까지 남은 일주일을 비춘다. 위기를 막으려는 사람(김혜수)과 위기에 베팅하는 사람(유아인) 그리고 회사와 가족을 지키려는 평범한 사람(허준호)의 이야기가 교차해 펼쳐진다.

이미 아는 사건인 데다 등장하는 인물과 에피소드는 허구의 상상으로 만들어졌는데도 영화가 담은 일주일의 막전막후를 보고 있으면 손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몰랐던, 그때의 이야기가 섬뜩하게 다가온다. 때문에 영화는 ‘경제스릴러’라고 지칭되기도 한다.


-이런 시나리오는 졸업작품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기성 작가가 오롯이 IMF를 구상하고 인물들을 설정해 만들었다면 쉽지 않았을 일이다. 나도 영화 일을 처음 할 땐 ‘이게 왜 안 돼?’ ‘하면 되잖아’ 그런 마음이 컸지만 이젠 많이 하다보니 ‘이건 이래서 안 되는구나’, ‘저건 저래서 안 되지’ 한다.(웃음) 많은 걸 생각하게 되니까.”


“말하다 보니 정말 졸업작품이어서 이런 시나리오가 가능했다는 생각이 든다.(웃음)”


“이번 작품을 하면서 새삼 느꼈지만 다들 (IMF에 관련된)사연 하나씩 있다. 나는 원래 광고회사를 다니다 IMF 전에 영화 쪽으로 왔다. 1997년에 첫 영화 ‘정사’를 했고. 광고계는 굉장히 호황이었지만 영화계는 그때 정말 어려웠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환경에 있다보니 IMF를 직접적으로 체감하진 못했다. 만약 광고회사에 다녔다면 달랐겠지. 직원이 500명쯤 되는 곳이었는데 절반 정도 정리해고 되기도 했으니까.”

이유진 대표는 ‘국가부도의 날’을 진행하면서 “세대별로, 혹은 직접 겪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IMF 외환위기가 각자 다 달랐다”고 했다. 다양한 세대가 공감하는 이야기로 만들기 위한 방향 설정에 고민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제작을 결심하기까지 오래 걸렸나.



“그렇진 않다. 그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을 뿐이다. 하하! 이 이야기에 욕심이 컸다. 해보고 싶다, 잘 만들어 보고 싶다는 의욕도 컸다. 좋은 영화로, 유의미한 작품으로 내보이고 싶었다.”


-주인공을 여성으로 설정한 점, 그 역할에 김혜수를 택한 점도 눈에 띈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주인공은 여성이었다. IMF 당시 모두가 ‘괜찮아 아무 문제없어’라고 할 때, 혼자서 ‘아니야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다수 혹은 주류에서 약간 벗어난 설정이어야 했는데 남성보다 여성이 적합할 것 같았다. 혼자 마음껏 쓰니까 어떤 제약도 없지 않나. 그래서 김혜수 배우를 상상하면서 썼다. 하하! 내레이션이 많으니 관객에 신뢰를 주는 배우여야 했다. 그런데 대표님도 읽자마자 김혜수 배우를 떠올렸다고 하길래 놀랐다.”


-프랑스 배우 뱅상 카셀(1997년 IMF 총재 미셀 캉드쉬 역할) 캐스팅도 화제다.



“정말 상상도 못한 캐스팅이다. 외국 배우를 잘 몰라서 시나리오 쓸 땐 귀화한 한 외국인을 상상하면서 썼다. 뱅상 카셀이 할 줄 알았다면 더 잘 쓸걸…. 내 부족한 상상력을 반성했다.”


-최근 1990년대를 다룬 작품이 많지만, 이 영화는 가장 현실적인 작품이 아닐까 싶다.


“그전엔 보통 ‘응답하라’가 있었지. 1990년대를 구현하기가 정말 어렵다. 조선시대 사극이라면 차라리 나을 텐데. 지금과 다른, 큰 차이가 없는데 차이를 보여야 하는 묘사가 정말 애매하고 어렵다. 은행원들이 주로 입은 유니폼, 관료들이 입는 무채색 정장부터 소품도 중요했다. PCS, 팩스는 물론이고 잠깐 등장하는 영화 ‘접속’ 포스터까지. 1997년을 대표할 영화니까 (‘접속’ 제작자)심재명 대표님께 전화해서 ‘써도 될까요’ 허락받고.(웃음) 챙길 게 많았다.”


“완성된 영화를 보니까, 앞으로 더 잘 써야겠구나 싶다. 하하하! 나는 아주 편하게 ‘90년대풍 오피스텔’ 이렇게 썼는데. 그걸 위해 너무 많은 분이 고생하고 있다.”


“그래도 엄 작가님이 쓴 건 좋다. 액션영화는 지문 한 줄로 ‘골목에서 수십 명이 싸운다’라고 돼 있으면 그걸 위해 몇날 며칠을 투자해야 하니까.”


-제작자가 보기에 엄성민 작가는?


“다음 작품도 같이 한다. 계속 함께하고 싶은 작가다. 소재를 다루는 방식, 시각, 감성이 좋다. 하나의 소재를 어떤 방향에서 다루느냐에 따라 많이 다를 수 있지 않나. 작가님의 감성은 조금 ‘드라이’한 편인 것 같은데, 나는 그런 감성을 굉장히 좋아한다. 글도 좋다.”


-작가가 보이게 제작자는?


“코멘트를 할 순 없겠지만…, 시나리오를 선택해 제작하는 과정에서 그야말로 시나리오를 ‘멱살 잡고 끌어올리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처음 쓴 시나리오는 드라이한 부분이 많았다. 그런 게 긍정적으로 영화에 담겼지만, 그걸 뛰어넘어 많은 분들이 보고 즐기는 영화로 끌어올린 역할은 대표님이 했다. 아, 이런 게 바로 제작자구나. 많이 배웠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고 싶나.


“실화든 사건이든 혹은 그게 아니더라도 베이스가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작가가 공부하고 찾아내 상상력을 더하는 이야기, 현실에 뿌리를 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집 근처 작업실에서 ‘나인 투 식스’(9시 출근 6시 퇴근)로 작업한다. 점심시간은 11시부터 12시까지. 하하!”


“보통 크리에이터들은 뭔가 독립적이고 자유로울 것 같지만 사실 시간을 딱 정해 놓고 성실하게 쓰는 분들이 작업성과를 더 많이 낸다.”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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