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은 끊임없는 기업 혁신과 결단력으로 두산그룹을 중공업 중심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기업가였다. 한편으로는 ‘침묵의 거인’으로 불릴 정도로 신중한 언행과 남다른 야구사랑으로도 유명했다. 오른쪽 사진은 박용곤 명예회장이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 박승직 창업주(오른쪽), 아버지 박두병 두산 초대회장과 함께 찍은 모습.
프로 2군·어린이회원도 최초 운영
병중에 휠체어 타고 훈련장 찾기도
선수들과 스킨십 즐긴 스포츠 대부
한국 경제의 ‘큰 어른’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이 3일 저녁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7세. 고인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인 두산(1896년 창업)이 오늘날 자산 30조 원, 재계순위 13위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기틀을 마련한 주역이다.
박용곤 명예회장은 1932년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의 6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동고를 졸업하고 6.25 전쟁 때인 1951년에는 해군에 자원입대해 참전용사로 싸웠다. 제대 후 미국 워싱턴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뒤, 1960년 한국산업은행 공개 6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남의 밑에 가서 남의 밥을 먹어봐야 노고의 귀중함을 알 것이고, 아랫사람의 심경을 이해할 것이다”는 선친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두산그룹에는 1963년 동양맥주(현 OB맥주)의 사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한양식품 두산산업 대표를 거쳐 1981년 두산그룹 회장에 올랐다.
● 과감한 결단으로 ‘글로벌 두산’ 초석 닦아
두산은 박승직 창업주 시절 포목점을 하다가 2대인 박두병 초대회장 때 주력사업을 식음료로 바꾸었다. 3대인 박용곤 회장은 끊임없는 기업 혁신으로 사세를 키워 두산을 중공업 그룹으로 탈바꿈했다.
경영자로서 박 명예회장의 결단력은 1998년 그룹의 대표사업인 OB맥주 매각에서 잘 나타난다. 당시 그는 “그룹 모태인 주류 사업을 어떻게 매각할 수 있느냐”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룹의 미래를 위해 과감한 변신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식음료 사업 매각 대금을 기반으로 2001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2005년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2007년 밥캣(현 두산밥캣) 등을 인수하며 그룹 주력사업을 중공업으로 바꾸었다.
● 인화와 인재 중시, 남다른 야구사랑
박 명예회장 말수 적은 과묵한 성품으로 재계에 알려져 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침묵의 거인’. 언제나 상대의 말을 경청한 뒤 자기 생각을 간결하게 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내 위치에서 무슨 말을 하면 그 말은 모두 약속이 된다”며 “지키지 못할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며 늘 신중한 언행을 강조했다.
또한 박 명예회장은 프로야구가 오늘날 한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자리잡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에 맞춰 가장 먼저 야구단 OB 베어스(두산 베어스 전신)를 창단했고, 어린이 회원 모집 역시 전 구단 중 가장 먼저 시작했다. 지금은 당연한 듯 모든 구단이 운영하는 2군을 한국 프로야구에서 가장 먼저 창단한 것도 박 명예회장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지병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뒤에도 그는 휠체어를 타고 두산의 전지훈련장을 찾아 선수들과의 직접적인 스킨십을 통해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유족으로는 장남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차남 박지원 두산중공업 회장, 장녀 박혜원 두산매거진 부회장 등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5일 오후2시부터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지며,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른다. 발인과 영결식은 7일이며, 장지는 경기 광주시 탄벌동 선영이다.
●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 약력
△ 1932년 서울 생 △ 경동고 졸, 미국 워싱턴대학 경영대 졸업(1959), 충남대 명예경영학 박사(1982), 연세대 명예법학 박사(1995) △ 1960년 한국산업은행 입사. 1963년 동양맥주㈜ 입사 △ 1966년 한양식품㈜ 대표이사 사장, 1973년 동양맥주㈜ 대표이사 부사장 △ 1974년 합동통신사 대표이사 사장 △ 1981년 두산그룹 회장 △ 1982년 프로야구단 ‘OB BEARS’ 구단주 △ 1983년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 1996년 두산그룹 명예회장 △ 1998년 두산건설㈜ 대표이사 회장 △ 2008년 학교법인 중앙대학교 이사
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