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인터뷰] “영화 아닌 드라마로”…‘리틀 드러머 걸’ 박찬욱, 경계를 넘어
박찬욱 감독이 ‘리틀 드러머 걸’을 들고 돌아왔다. 기존 전작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영화가 아닌 드라마라는 것과 극장이 아닌 OTT(Over The Top) 서비스를 제공하는 ‘왓챠플레이’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2018년 영국 BBC와 미국 AMC에서 방영됐지만 이번에 공개되는 ‘리틀 드러머 걸’은 감독판이다. 방송용을 위해 제외된 장면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음악과 색, 카메라 앵글 등 박찬욱 감독이 원하는 바를 온전히 담아낸 버전이다.
‘리틀 드러머 걸 : 감독판’은 1979년 이스라엘 정보국의 비밀 작전에 연루돼 스파이가 된 배우 ‘찰리’와 그를 둘러싼 비밀 요원들의 숨 막히는 이야기를 그린 첩보 스릴러로 3월 29일 왓챠플레이에서 6편 모두 공개가 되며 채널A가 단독으로 이날 밤 11시 첫 화를 공개하며 매주 한 에피소드씩 방영한다.
이 작품의 원작은 영국 소설 작가 존 르 카레의 작품으로 박찬욱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야기라 별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의 적극 추천에 책을 보게 됐고 그것이 박찬욱 감독이 ‘리틀 드러머 걸’을 만드는 첫 장이 됐다.
<이하 박찬욱 감독과의 일문일답>
Q. 언론시사회에서는 1~2화만 공개가 됐다. 거기까지는 여전히 퍼즐을 맞춰가는 단계가 아니라서 그런지 내용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다.
A. 첩보 장르가가 어려워야 재미있는 맛이 있지 않나. 첩보스릴러 영화를 봐도 초반에는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진다. 보면 볼수록 퍼즐을 맞추듯 내용을 파악하는 과정이 재미있다. 어쩌면 왓챠플레이로 제공되는 점 중에 좋은 것은 무한 반복해서 볼 수 있다는 점일 수도 있다. 내용이 이해가 안 가면 계속 보면 되니까. (웃음)
Q. 동명 원작을 본 감독의 느낌은 어땠나, 혼란스러웠나.
A. 1/10은 혼란스러웠다. 그 책을 보려고 했던 사람들 중 대부분이 포기한다고 하더라. “아직도 500페이지가 남았어?”라면서. 이 책을 다 읽고 주인공들이 픽션 세계에서 연기를 해야 하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이스라엘 정보부 요원인 ‘가디 베커’(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인척 살아야 하고 무명배우이자 스파이가 된 ‘찰리’(플로렌스 퓨)는 테러리스트의 애인으로 살아간다. 그러면서 두 사람이 진짜 사랑에 빠지고 현실과 픽션을 오가며 흔들리는 이들의 정체성이 흥미로웠다. 또 모든 작전을 기획한 ‘마틴 쿠르츠’(마이클 섀넌)에게 반한 점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설계하지만 그 역시 작전에서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내가 새로 쓴 대사가 “내가 이 드라마의 작가이자 프로듀서이자 감독이다”였다. 존 르 카레 ‘팅거, 테일러, 솔져, 스파이’의 ‘조지 스마일리’가 방에 틀어 박혀서 계획만 짜는 사람이라면 ‘마틴 쿠르츠’는 자기 자신도 연기를 한다는 점에 있어서 변화무쌍한 매력을 느꼈다.
Q. ‘올드보이’, 아가씨‘ 등 원작을 중심으로 한 작품이 좀 있다. 누군가는 ’박찬욱은 게으른 감독인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웃음)
A. 영화 역사에 위대한 작품은 남의 작품을 각본, 각색한 작품이 많다. 창작보다는 오히려 더 많다고 생각한다. 직업 감독으로서 원작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거리낌은 없다. 사실 별 차이도 안 느껴진다. 내가 영감을 받아 쓴 작품이든 남의 것을 고쳐서 쓴 작품이든 시작은 ‘주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내 오리지널 각본 역시 내 경험이나, 꿈 등 어디선가 주어진 것에서 영감을 받아 쓴 것이고 원작 역시 내가 읽고 나서 같은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서 크게 다른 점을 느끼진 못한다.
Q. 영화로 옮기지 않은 이유는 뭔가.
A. 처음엔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그런 희망을 안고 책을 읽었지만 책을 덮었을 때는 그 희망을 접었다. 분량이 워낙 방대했기 때문에 영화로는 다 담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Q. 반대로, 시즌제를 만들 생각은 없었나.
A. 내용은 마쳐야 했으니 시즌제로 가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작진들끼리 스핀오프를 만들자는 이야기를 농담으로 하긴 했었다.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 ‘찰리’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사회학과 대학원생으로 변장을 한다. 매우 귀여운 외모에 공부밖에는 사람으로 변장을 했고 플로렌스 퓨가 남아공 억양을 너무 잘해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었다.
Q. 소설을 영상으로 옮겼을 때 관객들은 어떤 재미를 느낄까.
A. 글로 읽을 때보다 더 실감나는 픽션의 세계가 감각적으로 다가올 거라 생각했다. 알렉스 스카스가드가 원래 본인의 역인 이스라엘 정보부 요원 ‘가디 베커’로 연기할 때와 극 안에서 또 연기를 하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미셸’을 연기할 때 태도와 억양 등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점이 영상에서 볼 때 재미를 느끼는 지점이 아닐까.
Q. 이미 ‘스토커’ 등으로 영문대사인 작품을 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대사를 영문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대사가 갖고 있는 특유의 느낌을 전달하는 것에 어려움도 있을 것 같다.
A. 정원조 프로듀서가 통역을 겸했는데 정말 잘했다. 내가 왜 이런 문장을 만들었는지 영국인 작가들에게 직역에 가깝게 통역했고 그 의도를 들은 작가들이 영어로 자연스럽게 바꾸는 과정을 거쳤다. 그 과정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구체화 시키고 또 현장에서 배우들이 연기를 하며 아이디어를 내면서 수정을 하는 과정도 있었다.
Q. 여섯 에피소드를 총 81회차에 걸쳐 완성했다.
A. ‘스토커’는 40회차를 찍었다. ‘리틀 드러머 걸’은 더 서둘러서 찍긴 했지만 ‘스토커’의 경험이 보탬이 됐다. ‘아가씨’는 68회차를 찍었는데 ‘스토커’보다는 좀 더 화려하고 시대재현 때문에 정교함이 필요해 더 걸렸다. 그런데 ‘스토커’를 찍기 전에 ‘아가씨’를 찍었다면 90~100회차로 찍었을 것이다. ‘스토커’를 찍었기 때문에 ‘리틀 드러머 걸’도 그렇게 촬영할 수 있었다. 바쁘게 찍었지만 대충 찍진 않았다.(웃음) 이게 다 김우형 촬영 감독 덕이다. 빨리 빨리 촬영할 수 있게끔 일을 했다. 저예산 독립영화를 찍던 감독이라 훈련이 돼 있더라.
Q. 영국, 그리스, 체코 등을 오가며 촬영했다. 감독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소는 어디인가.
A. 아마 보시는 분들 중에 ‘스윽’하고 스쳐지나갈 수 있다. 극중에서는 독일 아우토반에 근교 모텔로 나온다. 방 하나를 빌려 ‘모사드’팀이 거기서 계획을 꾸미는데 방 구조나 색이 정말 특이했다. 누가 보면 인위적으로 꾸몄을 것 같은데 실제로 있는 방이다. 그 방 구조를 잘 써먹으려고 노력했는데 잘 나온 것 같다. 재미있는 사실은 로케이션 팀이 ‘이 방은 안 고르겠지’라고 생각했던 방을 내가 골랐다는 것이다. 최종결정자는 나니까. (웃음)
Q. 의상도 강렬한 원색이 많았다.
A. 두 번째 에피소드 마지막에 나오는 빨간색 벤츠서부터 출발했는지 모르겠다. 미술 콘셉트를 정할 때 패턴을 많이 쓰지 않는 단색을 쓰자고 했다. 그 이유가 70년대에서 80년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찰리는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였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70년대 유행했던 히피 룩은 과감히 없앴다. 또 찰리의 무모함과 용기, 대담성을 표현하기에는 대담한 원색이 좋을 거라 생각했다.
Q. 앞서 언급했지만 현실 속에서 연기를 하며 사는 이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고 했다. 그 장면 중 좋아하는 장면이 있나.
A. 초반에 그리스 해변에서 가디 베커와 찰리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있다. 찰리가 아이스크림을 다 먹자 가디가 막대를 자기 주머니에 넣는 ‘훈훈함’을 보인다. 가디가 그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한 연기일지 아닌지에 대한 장면이 마음에 들고. 그리고 찰리가 ‘나는 이거 안 할 거야’라며 쿠르츠에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 때 쿠르츠가 가디에게 ‘찰리 좀 어떻게 해 봐’라고 하는데 이후에 두 사람의 정사 장면이 나온다. 이것이 찰리의 마음을 돌리려는 가디의 선택인지, 아니면 진짜로 그를 사랑하기 때문인지는 본인조차도 혼란스러워하는 장면을 좋아한다.
Q. ‘친절한 금자씨’, ‘스토커’, ‘아가씨’ 등 여성 중심의 영화가 많았다. ‘리틀 드라마 걸’의 ‘찰리’도 그 연장선상으로 생각해도 될까. 이제 남자 이야기는 볼 수 없는 걸까. (웃음)
A. 신기하게 내가 남성 위주의 기획을 낼 때는 투자가 미뤄진다. 하하. 여성 중심 서사가 더 매력적인지 몰라도. 내가 오랜 시간 각본을 쓴 남성 중심의 두 개의 이야기는 자꾸 뒤로 밀리더라. 아내도 그렇고 딸이 하나라서 그런지 성장하니까 더 관심이 가게 되는 것 같다. 그건 개인적인 이유고. 유능해서 기용했을 뿐인데 시나리오 작가부터 미술, 의상을 담당하는 분들이 여성이 많다. 그들의 영향을 받은 것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이나 내면의 갈등은 좀 더 복잡해서 풍부한 캐릭터를 만들 수 있다. 남자는 단조롭다. 하하.
Q. 6편을 동시에 보여주는 시사회를 가지기도 했다.
A. 나도 관객들과 함께 봤다. 방송판이고 감독판이고 영화관에 앉아서 한 번에 다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보면서 이제 이 작품을 떠나보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 반응도 좋았다. 신청하신 분들이 6시간을 연이어 보겠다고 작정하고 오신 분들이라서 전투적으로 관람하시더라. 내게 있어서 최고의 관객들이 아닐까 싶다.
Q. 대중들은 박찬욱 감독을 생각하면 ‘파격’이라는 단어가 생각날 것 같다. ‘리틀 드러머 걸’은 그 단어와는 조금 거리가 멀어보이는데.
A. 모든 게 배분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리틀 드러머 걸’은 고전적이고 우아하고 심리 스릴러지만 그 안에서도 새로운 시도들이 있다. 단지 고전적이고 우아함과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것 중 어느 것이 크게 들어오느냐에 차이인 것 같다.
Q. “박찬욱 감독 작품은 봐야지”라는 대중들의 반응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A. 글쎄, 나는 캐스팅에 공을 굉장히 많이 들인다. 캐스팅을 해놓은 다음에 대본을 맞춤으로 수정을 하는 편이다. 그래서 관객들에게 “배우들이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면 좋겠다.
Q. 차기작 소식도 있더라. 미국 서부극 스릴러 ‘브리건즈 오브 래틀버지’를 맡는다고.
A. 보도에 대한 내용은 사실이지만 투자확정이 안 됐다. 언급이 좀 힘든 부분이 있다.
동아닷컴 조유경 기자 polaris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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