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를 사랑한 그린 위의 ‘보통사람’ 노태우 전 대통령을 기리며

입력 2021-10-29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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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왼쪽에서 3번째). 사진제공|김맹녕

스코어 직접 적는 등 동네아저씨 닮아
핸디캡 18·드라이버 거리 180m 수준
‘100돌이’ 김옥숙 여사 유머도 뛰어나
노태우 전 대통령과 영부인 김옥숙 여사와 함께 골프 라운드를 함께 한 것이 벌써 26년 전 일이다. 대통령 퇴임 2년 후인 1995년 8월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하와이대 동서문화센터 특별강사 초청으로 하와이를 방문했다. 강연을 마친 후 노 대통령은 하와이 마우이 섬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면서 골프를 즐기는 중 당시 대한항공 지점장이였던 필자를 골프에 초대했다. 당시 필자는 JAL(일본항공)이 주최하는 하와이 아마추어 챔피언 대회에서 우승을 해 골퍼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노 전 대통령과 김옥숙 여사, 필자 그리고 골프장 프로와 마우이 카팔루아 골프 클럽(Kapalua Golf Club)에서 18홀 라운드를 시작했다. 그린위에서 만난 전직 대통령은 권위의식은 찾아볼 수 없고 평범한 영국 신사로서 골프에 매진하는 모습이 대단히 진지했다. 핸디캡 18정도에 드라이버 거리는 180m정도이고 페어웨이에서는 아이언보다 우드를 즐겨 사용했다.

육군사관학교 및 오랜 군 생활로 원리 원칙이 몸에 배인 노 대통령은 골프 플레이도 골프 규정대로 라운드를 진행한다. 골프순서 어너도 스코어 순으로 치자고 하면서 극구 먼저 티샷 권유를 뿌리쳤다. 한번 볼이 깊은 벙커에 빠져 페어웨이로 볼을 던지려고 하자, 만류하며 그대로 벙커샷을 했다. 샷을 끝난 후 모래 발자국도 본인이 고무래로 정리한다. 퍼팅에서도 홀에 좀 떨어진 거리의 것을 속칭 오케이를 주자 언짢은 표정을 하면서 나를 무시하는 행동이라며 끝까지 홀아웃을 고집한다.

스코어도 본인이 직접 적는데 R1은 대통령이고 R2는 김옥숙 여사 약자로 써 놓고 한 홀 한홀 스코어를 기재했다. 스코어 카드를 집으로 가져가 오늘의 샷을 반성하고, 평가를 한다고 한다. 상대방이 똑바로 장타를 치면 굿샷과 퍼팅이 굴러 들어가면 ‘나이스 인!’하면서 콜을 해주어 우리를 부드럽게 해줬다. 먼저 퍼팅이 끝나면 깃발을 잡아주고, 퍼팅라인의 볼도 옆으로 퍼터 길이만큼 옮겨준다. 그는 티잉에리어의 부러진 티를 쓰레기통에 집어넣어 전직 대통령이라는 무거운 선입관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한편 함께 라운드한 김옥숙 여사는 스코어는 겨우 100타를 끊은 수준이나 라운드 중 늘 웃으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주었다. 호주머니 속에서 피로회복제 등을 주어 동네 누나같은 기분이었다. 사진도 같이 찍자고 하면서 서울 오면 집에 꼭 오라고 전화번호도 알려주었다.

첫 홀에서는 긴장돼 분위기가 딱딱했지만 18홀 라운드가 끝날 무렵에는 아주 친숙한 친구들과 같이 서로가 자연스러웠다. 라운드가 끝난 후 저녁식사를 하면서 대통령으로서의 애환과 고충을 한참 말하고 난후 훌라춤을 감상하는 모습을 보니 대통령의 무거운 직책을 벗은 그 분의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김맹녕 골프칼럼니스트

연제호 기자 sol@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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