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비올라는 기도하고 있었다”…김남중 비올라 독주회 ‘Blooming’ [공연리뷰]

입력 2022-03-13 16: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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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독주회 열려
비올라 독주회 시리즈 ‘활이 춤춘다 Ⅵ’, 타이틀은 ‘블루밍’
세계 최초, 비올라로 연주한 지영희류 해금산조 큰 감동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이 땅에 깃들기를”…객석 울린 ‘모르겐’
비올라는 참 속 깊은 친구 같다 … 라는 것이 평소 나의 감상이다. 이 얘기는 ‘알다가도 속 모를 사람’이라는 의미와도 상통한다.

생김새로 보나 체구로 보나 딱 바이올린과 첼로 중간에 껴 있는 포지션이지만, 이 둘이 목소리를 돋을 때면 슬그머니 작아져버리곤 하는 비올라씨.

그러다가도 한번 화를 내면 ‘한 성질’ 하시는 분이라는 생각이다.

뭐니 뭐니 해도 비올라 음색의 매력은 중음에 있다. 흔히 바이올린을 여성적, 첼로를 남성적이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비올라는 다분히 중성적이다. 그 중음은 오직 비올라만이 가능한 영역을 터치해 왔는데, 그래서 비올라는 세상에서 슬픔을 가장 우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악기가 되었다.


김남중은 비올라를 연주하는 사람이다. 그는 ‘UN이 선택한 유일한 비올리스트’라는 엄청난 이름을 갖고 있다. 2014년 미국 뉴저지 상원의원상을 받았던 김남중은 2년 뒤 전 세계 비올리스트 최초로 뉴욕 UN본부 총회의장에서 독주 무대를 가졌다. 그의 연주는 UN을 통째로 매료시켰고, UN은 그를 위해 국제평화기여 예술가상을 마련했다.

3월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열린 김남중 비올라 독주회는 90분 남짓한 시간 동안 ‘김남중 비올리즘’이 객석을 향해 쏟아져 내린 시간이었다. 그의 ‘플래그십 시리즈’라고 할 수 있는 독주회 시리즈 ‘활이 춤춘다’의 여섯 번째 무대로 타이틀은 ‘블루밍(Blooming)’. 코로나19의 기나긴 터널을 지나는 동안 김남중은 이번 두 번의 독주회(3월 5일에는 부산문화회관 챔버홀 공연)를 위해 활을 더욱 날카롭고 단단하게 갈고 두드렸다.


김남중은 독주회에서 슈만의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소곡집(Fantasy pieces for viola and piano)’ Op. 73과 에드윈 요크 보웬의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판타지(Phantasy for viola and piano)’ Op. 54(이상 1부), 지영희류 해금산조, 멘델스존의 ‘첼로 소나타 2번’ Op.58(이상 2부)을 연주했다.

1부의 두 곡이 모두 ‘판타지(환상곡)’라는 점도 흥미롭다. 슈만의 판타지는 원래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작품이지만 슈만은 비올라, 첼로, 바이올린과 같은 현악기로 연주하는 것을 선호했다고 한다.
보웬은 비올라 사(史)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 50여 년의 음악 생활 중 160여 개의 작품을 남겼는데 비올리스트 출신 작곡가답게 비올라 곡을 다수 남겼다.

19세기와 20세기 작곡가가 썼지만 두 작품 모두 ‘판타지’ 작품 특유의 자유로움, 환상성을 가득 품고 있다. 김남중의 화려하고 격렬한 퍼포먼스를 만끽할 수 있는 곡들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슈만, 비올라라는 악기를 밑바닥까지 이해하고 있는 보웬. 감정의 분출은 분수처럼 힘이 넘쳤고 선이 굵은 김남중의 비브라토는 관객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날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는 지영희류 해금산조였다. 김남중은 세계 최초로 해금산조를 비올라로 연주했다. 9년간 몸담았던 서울시향을 떠나(2014년) 솔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김남중은 도전과 실험의 쉽지 않은 길을 씩씩하게 걸어왔다. 비올라라는 악기의 확장은 물론 연극과 무용,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결합한 융복합 공연 ‘오늘은 비올라(2019)’를 기획해 선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연극무대에 배우로 출연한 적도 있다.

이번 연주를 위해 김남중은 지영희류 해금산조를 직접 비올라 연주용으로 편곡하는 한편 해금의 음색, 연주기법을 해체해 비올라에 체화시켰다. 그 결과 해금의 소리를 단순히 비올라에 이식한 것이 아닌, 비올라를 위한 ‘비올라 산조’가 완성됐다.

‘허튼 가락’이라 불리는 산조는 국악 중에서 즉흥성과 창작성이 요구되는 독특한 장르. 산조를 판타지의 영역에 포함시킬 수 있다면 이날 김남중은 프로그램의 대부분을 판타지 작품으로 채운 셈이 된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음악사상 최초로 공개된 비올라의 산조연주를 마주한 관객들은 이날 연주회에서 가장 큰 박수와 함성을 무대로 돌려보냈다.

비올라를 위해 편곡된 멘델스존 ‘첼로 소나타’를 마친 연주자를 관객들은 몇 번이나 무대로 불러냈다.
그의 앙코르곡은 R. 스트라우스의 성악곡 ‘모르겐(Morgen)’. 독일어로 ‘내일’이면서 ‘아침’을 의미한다(독일어 아침인사는 구텐모르겐).

김남중은 “러시아의 침공으로 전쟁의 고통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아이들의 참담한 모습을 떠올리며 이 곡을 골랐다”고 했다. 그가 뉴욕 UN본부에서 연주한 무대 역시 세상의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것이었다.

모르겐을 연주하기 전 마이크를 잡은 김남중은 울먹이며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비올라를 턱 밑에 끼우고 못 다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태양은 내일 다시 떠오르리/그대와 내가 행복하게 걷는 이 길을 비추리/태양을 호흡하고 있는 이 찬란한 대지 위에/저 물빛처럼 파란 해변가에 조용히 우리는 앉으리/말없이 너의 눈을 바라보며/영원한 행복 속에 잠기리”

김남중의 모르겐은 위로의 눈물이 되어 객석으로 뿌려졌다.
전쟁이 끝나 더 이상 고통 받는 이들이 이 땅에서 사라지도록. 살육과 고통이 남긴 전쟁의 상처가 치유되어 아물 수 있기를.
오늘 자고 눈을 뜨면 평화의 태양이 내일 아침 떠오를 수 있기를.
김남중의 비올라는 기도하고 있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제공 | Jeremyvisu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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