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의C.S.I.]살아보고결혼할수있다면…

입력 2008-04-2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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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년 전 신문에서는 조혼의 야만성을 비판하는 기사들이 줄줄이 실렸다. ‘독립신문’은 조혼이란 “아직 털도 덜 마른 어린 남녀들로 하여금 그 부모의 무릎 아래서 쌍쌍이 놀게 하는”(1899년 10월7일자) 어리석음이라 질타했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한국사회는 이제 정반대로 만혼의 시대가 되었다. 배우자는 물론 자녀의 수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었던 100년 전에 비해 이제 모든 것이 치열한 선택의 문제로 바뀌었다. 마이클 커닝햄의 소설 ‘세상 끝의 사랑’에서 딸은 어머니에게 묻는다. “도대체 엄마는 왜 그런 남자와 결혼하신 거죠?” 어머니는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그 시절에는 그렇게 거창한 질문은 하지 않았단다. 넌 그렇게 많이 생각하고 궁금해 하고 계획하는 게 힘들지도 않니?”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을 쟁취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결혼을 해도, 결혼 자체가 결혼의 유지를 보장해주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렸기에.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인기 코너 ‘우리 결혼했어요’는 우리 사회가 그린 ‘만혼 시대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솔비-앤디, 신애-알렉스, 사오리-정형돈, 서인영-크라운 제이. 이 네 커플의 가상결혼이라는 기상천외한 상황을 설정한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는 ‘그래, 살아보고 결혼하는 것이 좋을지도 몰라’라는 시청자들의 은밀한 호기심을 충동질한다. 사실혼의 급증, 혼인신고를 늦추는 부부들이 늘어나는 현상은 ‘혹시 이 사람이 내 천생연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뿌리를 박고 있다. ‘우리 결혼했어요’는 결혼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결혼의 환상과 현실을 동시에 파헤치는 에듀테인먼트를 추구한다. 기존의 수많은 짝짓기 프로그램으로부터 ‘우리 결혼했어요’가 한 발 나아간 점은 바로 짝짓기 ‘이후’의 현실을 오밀조밀하게 담아내는 생활의 구체성이다. 가식적인 멘트와 황당한 장기자랑을 통해 여심을 사로잡는 기존의 짝짓기 프로그램의 비현실성을 넘어, ‘우리 결혼했어요’는 함께 김치를 담그고 짐정리를 하며 일상의 구체성 속으로 성큼 발을 내딛는다. 물론 이들은 가상커플이기에 실제 커플들처럼 전세금 걱정도, 부모님의 반대도, 자녀의 뒷바라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상커플의 알콩달콩 러브스토리는 자식 한 명을 키워 결혼시키는 데까지 평균 3억8000만 원이 든다는 끔찍한 현실과 ‘아직’ 맞서지 않아도 된다. 결혼은커녕 연애도 순탄치 않은 수많은 영혼들에게 ‘우리 결혼했어요’는 ‘염장커플’의 무차별 포격이다. 그러나 ‘우리 결혼했어요’의 진정한 매력은 사랑의 시작과 종말에만 초점을 맞추는 여느 로맨스와 달리, 사랑의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우리는 상대에 대한 환상 때문에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정작 그 환상이 깨졌을 때, 그의 결점이 만천하에 드러났을 때, 그럼에도 그가 더더욱 아름다워 보일 때, ‘한 사람에 대한 두 번째 사랑’이 시작된다. 정형돈은 그 복지부동의 게으름 때문에 사오리의 미움을 받았지만, 바로 그 게으름이 이제는 점점 ‘고쳐나가는 재미’의 출발점이 되었다. 우리는 결점 없는 연인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결점으로 인해 더욱 사랑스러운 대상을 원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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