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자 이강(사진)의 가방 안에는 서류 파일이 여러 개 들어있었다. 가장 두툼한 파일 안에는 현재 출연 중인 MBC 드라마 ‘이산’의 대본 중 자신의 대사만 간추린 종이가 여러 장 담겨 있다. 이 종이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극의 상황과 대사 톤을 꼼꼼하게 분석해 써 놓은 그의 메모가 함께 적혀 있다.
‘이산’에서 이강의 비중은 크게 높지 않다. ‘기방의 집사’ 역을 맡고 있지만 열정만큼은 주연배우 못지않다. 사실 그는 늦깎이 연기자다. 26살이던 10년 전 광고 모델로 시작해 연예계에 첫 발을 내딛은 그는 연극으로 눈을 돌려 극단 청우에서 연기를 익혔다.
단역부터 주·조연을 거치며 ‘모세’, ‘로미오와 줄리엣’ 등 6편의 무대에 섰다. 연기자라면 빨리 얼굴을 알리고 주목받는 배역을 맡고 싶은 인지상정. 이강은 “기회를 찾지 못해 긴 방황을 겪었다”고 했다. 이 때 만난 작품이 김기덕 감독의 영화 ‘숨’이다. 이강은 교도관 역할을 맡아 관객에게 날카로운 인상을 심어줬다.
“워낙 저예산 영화로 급하게 찍었지만 마치 전쟁하듯 영화를 대하는 김기덕 감독의 열정을 지켜보며 제 자신이 부끄러웠다. 열정은 뜨겁지만 누구보다 겸손한 김 감독의 모습에 연기자의 길을 다시 찾게 됐다.”
이어 기회가 온 것이 MBC ‘이산’이다. 합류한 일은 이강이 ‘이산’에 자신이 캐스팅 된 것을 ‘행운’으로 꼽는다. 등장인물이 많아 나오는 장면은 적고, 추운 날씨에 야외 세트에서 7∼8시간 기다리는 게 다반사인데도 그는 “행복하다”고 했다. “일요일 오후나 월요일 오전에 대본이 나오면 제 출연 분량을 먼저 찾아본다. 대사가 없을 때도 있다. 섭섭하지 않다. 하지만 기회는 언제든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6월 9일 ‘이산’이 막을 내린 뒤 이강의 다음 도전 다시 연극이다. 그는 모노드라마 ‘독창’;에서 주인공으로 무대에 오른다. “아들이 연기하는 걸 끝까지 반대하다가 눈을 감은 아버지를 가슴 속에 늘 품고 산다”는 이강은 “연기자로 인정받을 날까지 희망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