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집중탐구] 종말론 마케팅 기승

입력 2009-11-15 17:44:47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2012년 종말론을 배경으로 한 영화 ‘2012’의 스틸컷. 대지진으로 무너지는 미국 LA 도심. 출처·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

2012년 종말론을 배경으로 한 영화 ‘2012’의 스틸컷. 대지진으로 무너지는 미국 LA 도심. 출처·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고작 3년… 종말론 마케팅 기승
인터넷서 급속도로 번지는 '2012년 종말론'을 다룬 할리우드 재난 블록버스터 '2012'가 12일 세계 동시 개봉했다. 우리 돈으로 약 3000억 원이 투입된 이 영화는 국내에서도 예매율 70%로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는 등 관객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2012년 12월 21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2012 종말론'은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서 출토된 마야 달력이 기원전 3114년 8월 시작해 2012년 12월21일에 끝난 것에서 출발한다. 여기에 3600년 주기로 공전하는 니비루 행성(행성 X)이 지구와 충돌한다거나 태양 흑점의 폭발로 지구의 자기장이 역전돼 급격한 지각 변동이 오고, 2만 6000년 만에 지구와 태양계, 은하의 중심이 일직선을 이루면서 지구 멸망이 시작된다는 인터넷 뜬소문이 더해졌다.

이에 대해 과학계는 "터무니없는 미신"이라고 일축하고 있지만, 영화 '2012'는 종말론 시나리오를 그대로 따라간다. 영화는 2012년 태양 흑점의 폭발로 튀어나온 뉴트리노(중성미자)가 지구 내부를 끓어오르게 하여 엄청난 지각 변동과 화산 폭발, 지진, 해일이 일어난다는 설정이다. '투모로우' '인디펜던스 데이'를 연출한 재난 영화 전문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가 연출하고 존 쿠삭이 주연을 맡았다.


에머리히 감독은 자신의 주특기를 살려 '투모로우'(기상 이변을 다룸), '포세이돈 어드벤처'(해저 지진), '단테스 피크'와 '볼케이노'(화산 폭발) 등 온갖 재난 영화들의 엑기스를 '2012' 안에 담아냈다. 거대한 스펙터클로 LA를 침몰시키고, 에베레스트 산맥마저 물에 잠기게 한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은 화산폭발로 불바다가 되고 항공모함이 백악관 위로 떨어진다.

해외 언론은 비주얼만 치면 '역대 재난 영화 중 최고'라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 평단에서는 그리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종말론 마케팅'…의도된 루머

비난의 초점은 영화가 지구 멸망에 대한 대중의 두려움을 이용해 일종의 '종말론 마케팅'을 펼쳤다는 데 맞춰져 있다.

영화의 배급사는 극장과 홈페이지에 올린 광고 동영상 마지막에 '지구 멸망의 날 60억 인류를 구하기 위해 각국 정부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구글에서 2012를 검색해 진실을 찾아보세요'라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인류보존연구소(IHC)'라는 유령 단체의 홈페이지를 만들어 지구 멸망 관련 소문을 확대 재생산했다.

홈페이지에는 여러 과학자가 2012년에 지구가 멸망할 가능성이 94%에 이른다고 예측했다는 등의 거짓말이 올라와 있다. 그리고 IHC는 1978년 지구 종말에 대비, 인류를 피신시키기 위해 세계 각국의 정치, 경제 과학 분야의 지도자들이 설립했다고 소개해 놓았다. 방문자가 친지나 애완동물의 이름을 등록하면 구원 대상에 포함하겠다는 내용도 있다. 인터넷에 기댄 전형적인 입소문 마케팅인 것이다.


NASA 소속 과학자 데이비드 모리슨 박사는 미 언론에 "니비루 행성 루머의 등장은 '2012'의 개봉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배급사 측은 IHC 홈페이지 하단에 자신들이 만든 사이트라는 저작권 표시가 (비록 깨알같이 작은 글씨지만) 돼 있고, 영화 '2012' 페이지로 가는 링크도 있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2012 현상'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기는 등 종말론은 미국에서 가볍지 않은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 미국 콜로라도 열기구 소동도 아이의 부모가 2012년 지구 종말에 대비해 지하 벙커를 건설할 돈을 마련하려고 꾸민 자작극으로 밝혀졌다. 외신에 따르면 휴대용 식수 정화 장치, 가스 마스크, 자외선 차단 담요, 태양열 발전기 등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

책 제목엔 '2012'만 넣어도 팔린다고 한다. 온라인 서점 아마존에 '2012'라는 키워드를 넣으면 6만 7000여 권의 책이 검색된다. 모리슨 박사는 언론에 "지구 멸망을 문의하는 청소년들의 e메일을 수천 통 받았는데 이 중에는 종말이 오기 전에 자살하겠다는 글도 상당수 있었다"고 밝혔다.

결국 미국 항공우주국(NASA)까지 나서 종말론 진화에 나섰다. 요지는 △마야의 달력이 2012년 12월21일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새 주기가 시작되고 △니비루 행성은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우며 △태양계 행성들이 정렬해도 지구엔 별 영향을 주지 않는데다 △태양의 흑점 폭발도 11주년 마다, 지구 자기장 역전은 평균 40만 년 마다 반복되는 현상으로 지구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이러스, 외계 침공, 대재앙…인류 멸망을 다룬 영화들

종말론을 다룬 영화가 '2012'가 처음은 아니다.
됐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했다는 1999년 종말론이 유행할 당시 '딥 임팩트'(1998) '아마겟돈'(1998) '엔드 오브 데이즈'(1999) 등 인류 멸망을 다룬 영화가 쏟아졌다. 요 근래에만도 '나는 전설이다'(2007) '지구가 멈추는 날'(2008) '노잉'(2009) 등 종말론에 편승한 영화 몇 편이 개봉했다.
'나는 전설이다'는 암을 정복하려고 바이러스를 조작했다가 변종 바이러스에 의해 인류가 멸망한다는 줄거리고, 1951년 '지구 최후의 날'을 리메이크한 '지구가 멈추는 날'은 전지전능한 외계인이 아름다운 별 지구를 파괴하는 인류를 말살하러 우주선을 타고 온다는 내용이다.



올 초에 개봉한 '노잉'은 태양의 온도 상승에 따라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소멸한다는 줄거리인데, 지구 멸망 직전 천사처럼 날개가 달린 외계인이 나타나 선택받은 남녀 아이 하나씩을 우주선에 태워 지구와 비슷한 별에 데려가는 등 종교적인 색채도 띠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미 한 번 예언이 엇나간 노스트라다무스 신봉자들은 1999년이 계산 착오였으며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해가 2012년이라고 말을 바꾸고 있다.

고대 마야 문명의 예언을 다룬 영화가 화제가 되고 있지만 정작 마야 후손들은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AP통신에 따르면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서 아직도 마야 언어를 쓰는 후손 중에는 종말론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과테말라 국적의 마야 인디언 장로이자 마야 문명의 권위자인 아폴리나리오 픽스툰은 "지구 종말에 대한 질문을 하도 받아 지칠 지경"이라며 "종말론은 마야인의 생각이 아니라 서양(성경)에서 나온 얘기"라고 일축했다.

최현정 동아닷컴 기자 phoeb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