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영은이상우의행복한아침편지]아버지건강하게오래사세요

입력 2008-05-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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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아버지는 당신이 살아가는 이유 한복판에 언제나 큰 딸인 저를 두고 사셨습니다. 중학교 입학식 날, 입학선서를 하던 제 모습을 운동장 끝에서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셨습니다. 동네 언니한테서 물려 입은 제 교복을 안타까워하시며, “교복이 너무 크다. 좋은 거 해주면 좋을 텐데…” 하고 말끝을 흐리기도 하셨던 분이었습니다. 예쁜 꽃망울이 이제 막 피어나는 것처럼 제가 갓 스무 살이 됐을 때, 연애질한다고 팔랑거리며 돌아다녀서 아버지와 심하게 다투기도 했었습니다. 아버지는 늘 똑딱거리는 벽시계와 신경전을 벌이며 제가 조금이라도 늦게 오면 야단을 치셨습니다. 저는 그런 게 싫어서 빨리 시집가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결혼하겠다고 떼를 써서 아버지와 심한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제 고집대로 결혼날짜 잡고, 저희 집에 처음으로 함진 애비가 들어오던 날, 아버지는 10년 묵은 인삼주를 헐어내시며 정성스레 사윗감과 사위의 친구들을 대접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주를 핑계 삼아 살짝 비추셨던 눈물….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봤던 그 날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런데 제가 결혼하고 한 3년쯤 지났을까 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30여 년의 세월을 관광버스 운전기사로 사셨던 아버지는 하루 3갑의 담배를 피우셨습니다. 그 전부터 풍치 때문에 진통제를 드시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게 결국 구강암으로 번져서 수술까지 받게 되셨던 겁니다. 암이 이미 잇몸과 턱, 가슴께까지 퍼져 있어서 상태가 많이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주치의 선생님은 수술을 해도, 전이부위가 워낙 넓어서 생사를 확언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선생님을 붙잡고, “의사 선생님요∼ 내사마 딴 욕심은 없습니더∼ 내가 쪼매만 더 낫게 사는 거. 우리 아부지한테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심더. 그때 까정만 지발 살리 주이소. 지∼발 살리 주이소” 하면서 부탁을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10시간의 대수술, 수술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온 아버지는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주치의의 한마디 “다행히 수술은 잘 되었습니다.” 그 말에 저희 가족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자리에서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도 15번의 항암치료를 받고, 방사선치료를 받으시면서 아버지는 점점 건강을 회복 하셨습니다. 마침내 퇴원을 하시고 시골마을로 돌아오실 수가 있었습니다. 수술부위가 너무 컸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 하시는 후유증은 얻으셨지만, 저희 가족들은 그것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버스기사였던 아버지께, 오른쪽으로 고개를 못 돌리는 건 운전 할 때 매우 큰 장애였습니다. 접촉사고가 나면 늘 오른쪽에서 났고, 아버지는 점점 운전하는 걸 겁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때, 아버지를 운전대에 도로 앉히신 분이 바로 어머니셨습니다. 어머니는 “30년 넘게 해온 일인데, 고까짓 수술 한 번 했따꼬, 운전 몬한다 소리하믄, 그건 말이 안 되제. 당신, 겁낼꺼 한 개도 없습니더”이러면서 자신감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 자신감 덕분에 아버지는 다시 자동차 운전을 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요즘은 자동차보다 오토바이 타시는 걸 더 좋아하십니다. 얼마 전에도 친정에 내려갔더니 아이들 주전부리 사 오신다며 읍내 장터로 휑하니 나가셨습니다. 돌아오실 때는 손자들의 주전부리들로 고만고만한 봉지들이 오토바이 뒷자리에 그득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어릴 때 저를 태우고 자전거로 한바퀴 마을을 도셨던 것처럼, 요즘은 우리 아이들을 오토바이 뒷자리에 태우시고 마을 한 바퀴를 돌고 오십니다. 늘 큰 딸에게 넘치는 사랑을 주셨던 분입니다. 그 아버지께서 생사의 고비도 넘기시고, 이제는 손자손녀들에게 또다시 넘치는 사랑을 베풀고 계십니다. 그 모습이 그저 감사하고, 앞으로는 건강하게 남은 생애 보내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경남 양산|윤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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