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인메모리]노히트노런프로1호방수원,골프선생되다

입력 2009-02-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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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구인생…‘역사적투수’골프선생변신
《1983년 5월 5일 어린이날. 적성국 중공의 민항기가 공중 납치돼 서울 근교에 비상착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어른들은 TV 앞에 모여앉아 뉴스속보를 들으며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게 아니냐”며 수군거렸고, 천진난만한 어린이들도 ‘멸공방첩’이라는 표어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터라 ‘중공’이라는 한마디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긴장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정확히 1년이 지난 1984년 5월 5일 어린이날에도 사건이 터졌다. 해태 방수원이 느닷없이 ‘노히트노런’이라는 생소한 대기록을 수립한 것. 1982년 프로야구 탄생을 계기로 야구의 블랙홀에 빠진 ‘프로야구 키즈’ 중 그제서야 노히트노런의 개념을 알아차린 친구도 많았다.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빨간날’을 선물해준 소파 방정환 선생이 방씨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로 자리잡고 있었지만 이날을 계기로 방수원이라는 이름 석자도 유명인물로 급부상했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노히트노런 주인공 방수원(49). 게다가 해태 타이거즈의 최초 선발투수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그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골프 레슨프로로 변신 광주광역시 봉선동에서 위치한 ‘영풍골프연습장’. 경쾌한 타구음이 실내연습장에 쩌렁쩌렁 울린다. “나같이 사그라진 사람 뭣하러 만나러 왔소. 우리 같은 사람은 주연도 아니고 조연에 불과한디.” 야구장갑 대신 골프장갑을 끼고 회원들을 지도하고 있던 그는 구수한 광주 사투리로 인사를 건네며 소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골프 레슨 프로로 전향해 있었다. “이게 참 재미있어요. 좋아했던 운동이고 야구와 비슷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상대를 이해시키기도 쉽고. 물론 프로골퍼는 무슨 말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제가 볼 때는 골프가 야구보다 훨씬 쉬워요. 요즘 50대 교장선생님도 골프 배우고, 70대 할아버지도 골프 배우잖소. 야구는 그 나이에 어디 배울 수 있습니까.” 그는 90년대 중반 해태 2군 코치 시절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다. “2군이야 오후에 훈련이 끝나니까 골프를 배울 시간이 생겼죠. 골프하는 재미에 빠져 결국 95년 코치도 그만두게 됐어요.” 유니폼을 벗은 뒤 개인사업을 하던 그는 2년 전 골프 티칭 프로 자격증을 딴 뒤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고 있다. ○노히트노런의 추억 그를 만나고서, 아니 만나기 전부터 노히트노런의 상황이 궁금했다. 84년 5월 5일 광주구장. 선발과 중간을 오가던 그는 전날까지 승리 없이 시즌 2패만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삼미전에 선발 등판해 9회까지 볼넷 3개만 내준 채 삼진 6개를 곁들여 아웃카운트 27개를 잡아냈다. 8-0 승리. 외야플라이도 4개에 불과할 정도로 타구는 대부분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해 1승8패를 기록했으니 그에겐 시즌 유일의 승리였다. “김응룡 감독이 부임한 뒤로 저는 2이닝짜리 투수였소. 그런데 그날 선발투수가 펑크났나 봅니다. 유남호 코치가 갑자기 선발로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는 박제된 추억들을 하나씩 끄집어냈다. “2시경기였는데 날씨가 참 화창했소. 2회를 마친 뒤 난 내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평소처럼 덕아웃으로 들어와 스파이크를 벗고 운동화로 갈아신었죠. 그런데 더 던지라고 합디다. 4회 선두타자(김대진)에게 첫 볼넷을 내주자 아니나 다를까, 김응룡 감독이 나오더라고. 바뀔 줄 알았지. 그런데 웬일인지 다시 들어가네. 아마 준비된 투수가 없었나 봅니다. 5회까지 7-0으로 앞섰는데 6회 선두타자(김정수)를 볼넷으로 내보내니 감독이 또 나오려다 도로 들어가더라고요.” ○“2이닝짜리 투수 아니다” 온몸으로 항변 “노히트노런보다 완투를 해냈다는 게 더 기뻤어요. 난 2이닝짜리 투수가 아니다, 믿고 맡겨만 주면 나도 완투를 할 수 있다는 걸 김응룡 감독에게 보여줬다는 게 더 흥분됐어요.” 그것은 그의 생애 4번째 완투이자, 유일한 완봉이자, 마지막 완투. 프로야구가 탄생하던 82년 영남대 3학년을 중퇴하고 프로 유니폼을 입은 그는 89년까지 179경기에 등판해 통산 18승29패 18세이브, 방어율 3.75를 기록했다. “제가 뛰던 시절에는 요즘처럼 어디 홀드가 있었습니까. 승리, 세이브가 아니면 연봉협상에서도 할 말이 없던 시절이죠. 그래서 그 사건도 있었던 겁니다.” 그 사건이란 87년 김응룡 감독이 교체를 위해 마운드에 올라갔을 때 공을 건네주지 않으려고 뒷걸음질치다 2루까지 다다라서야 공을 빼앗기고 만 것을 이른다. “한 타자만 잡으면 세이브인데 교체하려고 하니. 그날로 엔트리에서 빠졌죠. 김응룡 감독한테 항명해서 살아남은 선수가 있습니까. ‘난 끝났다’는 생각으로 한 달 동안 밤낚시나 하고 있었는데 1군에 부릅디다. 그날 문희수를 구원등판해 최동원을 꺾고 역전승했던 것도 기억이 나네요.” 김응룡 감독은 그 이후 투수교체시 마운드에 오르지 않고 김인식 수석코치(현 한화 감독)를 올려보냈다. 다른 팀 감독들도 김응룡을 따라하기 시작하면서 감독이 아닌 코치가 투수를 교체하는 풍습이 생기기 시작했다. ○해태 사상 첫 선발투수 그를 기억하자면 해태 역사상 첫 선발투수였다는 사실을 들추지 않을 수 없다. 1982년 3월 28일 구덕구장에서 열린 롯데전. 해태는 왜 그를 역사적인 원년 개막전 선발투수로 낙점한 것일까. 해태 창단 감독을 맡은 ‘빨간장갑의 마술사’ 김동엽 감독은 이미 작고해 당시 투수코치였던 유남호 전 KIA감독에게 물어봤다. “창단 때 해태 투수가 6명이었어요. 그것도 타자까지 겸하는 김성한까지 합쳐서. 이상윤이나 신태중은 공은 빨랐지만 컨트롤에 믿음이 가지 않았고, 강만식은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걸로 기억해요. 그래서 구속은 떨어지지만 컨트롤이 좋고 변화구가 빼어난 방수원을 낙점했던 것이죠.” 그날 경기를 추억하며 방수원은 웃음부터 터뜨렸다. “1번(정학수) 볼넷, 2번(엄태섭) 유격수 실책, 3번(김정수) 볼넷. 무사만루부터 시작했죠.” 그는 4번 김용희와 5번 김용철에게 적시타를 맞고 강판됐다. 결국 2-14의 참패. 그는 4월 8일 춘천 삼미전에 다시 선발등판해 7이닝 2실점으로 역투하며 7-4 승리를 이끌고 생애 첫 승을 거뒀다. ○동생의 이름으로 살아온 세월 그의 원래 이름은 방승환. 방수원은 2살 아래의 친동생 이름이다. 그가 9살 되던 해 정읍 기차역에서 잃어버린 동생은 10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부친이 호적정리를 하면서 사망신고를 했다. 그러나 착오가 발생해 방승환이 죽은 것으로 신고되고 말았다. 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동생 이름 방수원으로 사는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 그런데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준 것은 야구였다. “83년 잠실경기를 앞두고 있었는데 동생이 구장 입구에서 매니저를 만나 ‘방수원 선수에게 잃어버린 동생이 없는지 물어봐달라’고 부탁했나봐요. 그 얘기를 듣고는 유니폼을 입은 채로 밖으로 달려갔죠. 매표소 앞에 줄을 서 있는 동생이 멀리서 보이더라고요. 핏줄은 무서워요. 16년의 세월이 지났고, 옆모습이었지만 30m 거리에서 내 동생 방수원을 알아봤으니까.” 동생은 고아원에서 자랐다고 했다. 친구들이 해태 투수 방수원과 많이 닮았다면서 찾아가보라고 권하면서 이날의 극적인 상봉이 이뤄진 것이었다. 그리고 동생은 자신의 이름을 형이 사용하고 있어 호적에 방득원이라는 이름으로 등록하게 됐다. “그날 하필 제가 선발이었어요. 매니저가 김응룡 감독한테 귀띔을 했지만 감독은 ‘동생이 야구보러 왔다’고 잘못 알아들었나봐요. 마운드에는 올랐지만 그날 공을 제대로 던질 수 있겠습니까. 어쨌든 야구 덕분에 동생을 찾았어요. 동생을 잃어버렸다는 가슴 속의 짐도 그제서야 풀게 됐고.” ○다시 태어나도 야구를…. 시속 130km 초반의 직구. 그러나 그는 선동열에게 전수해줬다는 슬라이더를 비롯해 특유의 꺾이고, 휘고, 솟구치고, 가라앉는 변화무쌍한 볼로 스트라이크존 모서리를 공략하며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 “난 어릴 때 논두렁에서 동네야구를 하면서 야구를 배웠소. 어릴 때부터 비쩍 말라 아무리 세게 던져도 구속이 안 나옵디다. 나만의 생존법을 찾아야했지요. 은퇴할 때까지 야구공을 손에서 놓지 않았어요. 잠잘 때까지 실밥 매듭을 잡고 틀어도 보고, 비틀어도 보고. 나 같이 강속구를 던질 수 없는 사람은 볼과 스트라이크 경계선에 던져서 범타를 유도해야만 하지요. 도망가는 피칭이 아니라 나로서는 그게 승부방식이었어요. 내 직구는 딱 치기 좋은 스피드였으니까.” 해태는 그가 유니폼을 입고 있던 80년대에만 5차례나 우승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조연’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선동열 같은 어깨를 타고나지 못했지만, 그래서 빛나는 성적도 올리지 못했지만 그 역시 나름대로 마운드에서 혼을 던졌다. 주연들이 피곤한 어깨를 쉴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 해태 왕조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도, 때론 중간계투로, 때론 패전처리로 고단한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고 마운드에 오른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는지 모른다. “야구하느라 고생도 많이 했죠. 그래도 원년 해태 투수 중 가장 늦게 은퇴했잖아요.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대단히 만족하지만 야구가 훨씬 재미있어요. 난 다시 태어나도 야구를 할 겁니다. 논두렁에서 혼자 배운 야구 말고, 요즘처럼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지도를 받으면서요.” 광주|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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