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s Who?]“내주무기는끼…나는야날라리복서”

입력 2008-03-23 00:0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인파이터 “왼팔을 쭉 뻗어보아라. 한 바퀴 돌아봐. 네 주먹으로 그린 원이 너라는 인간의 크기다. 원 안에서 손이 닿는 만큼만 손을 뻗어야 다치지 않고 살 수 있지. 그런 인생을 어떻게 생각해? 권투가 뭐냐? 원을 주먹으로 깨부수고 밖의 것을 쟁취하는 행위야. 원 밖에는 강적이 우글우글해. 적들이 원 안으로 치고 들어 올 거다. 맞으면 아프고 때려도 괴롭다. 그래도 할래?” -영화 ‘고(go)' 중에서- 이옥성(27·보은군청)의 대답은 “하겠다”였다. 아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시계 분해 조립을 할 만큼 영리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복싱 선수가 되는 것이 마뜩찮았다. ‘힘든 운동이니 한 달이면 그만 둘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들은 ‘내가 맞을 수 있는 거리에 들어가야만 상대를 때릴 수 있는’ 복싱의 솔직함에 매료됐다. “야수처럼 달려 들어가 때려 눕혀야 진정한 복싱선수”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이옥성은 인파이터가 됐다. ○변신 항상 최고 수준의 선수이기는 했다. 하지만 같은 체급에는 김기석(28·영주시청)이 버티고 있었다. 이옥성은 김기석을 상대로 11경기에서 단 1승만을 거뒀다.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선수는 단 한 명뿐. 메달은 커녕 출전 기회조차 잡지 못한 이옥성은 2004년, 복싱을 그만둘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이옥성의 인생을 바꾼 것은 2004년 12월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대회.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체력이 안돼 어쩔 수 없이 사이드를 돌면서 경기에 임했다. 힘이 부쳐서 흐느적거린 것인데 상대 선수들은 당황했다. 1위로 시상대에 오른 이옥성은 ‘무작정 때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귀국 후 코칭스태프와 상의 끝에 아웃복서로의 변신을 꾀했다. 포인트를 따는 법을 터득했다. 아시아 선수권대회 1위, 세게 선수권 대회 1위. 2005년은 이옥성의 해였다. ○자신감 이기다 보니 자신감이 생겼다. 이옥성은 “복싱은 손만 뻗을 수 있다면 이길 수 있는 운동”이라고 했다. 주눅 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잘하는 상대의 경기 화면은 딱 한 번만 본다. 반면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상대의 경기 화면은 여러 번 보며 자기 최면을 건다. 링에 올라가서도 자기 흥대로 복싱을 한다. 아마추어 선수답지 않게 가드를 내리기도 하고, 팔을 돌리면서 자신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나는 날라리 복서”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이옥성은 “유럽이나 중남미 선수들은 건방져 보일 정도로 자신감이 있고, 이길수록 더 기가 사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그들보다 더 건방지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진인사 대천명 올림픽에는 시드 배정이 없다. 경기 당일 결정되는 대진표는 무작위로 작성된다. 세계 랭킹 1,2위의 선수가 1회전에서 맞붙는 경우도 생긴다. 메달 유망주가 덜미를 잡혀 의외의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한다. 2004년 12월 이후 국제대회 28연승을 달리던 이옥성 역시 2006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한 수 아래로 평가받던 중국의 양보에게 졌다. 아마추어 복싱연맹 최희국 사무국장은 “금메달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고 했다. 이옥성이 “열심히 하면 당연히 대진운도 따를 것”이라고 해서 캐물었더니 역시 명답이 나온다. “똑같은 대진표를 받아도 훈련을 얼마나 했느냐에 따라서 마음가짐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대진표를 받아도 훈련량이 부족하면 불안하다”고 했다. 이옥성의 손등 뼈는 손목 쪽으로 밀려있다. 육안으로도 일반인과의 차이가 확연하다. 쉼 없이 샌드백을 친 결과다. 이옥성은 “나는 항상 대진운이 좋은 편”이라고 했다. ○은퇴 이옥성은 아직 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세계선수권 우승은 병역특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면 명예롭게 국가대표에서 은퇴를 하겠다는 것이 이옥성의 결심이다. 실업팀에서 선수생활을 계속하더라도 체급을 올릴 생각이다. “경기 때마다 7kg씩 감량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털어 놓았다. 미뤄왔던 신혼여행도 떠나야 한다. 이옥성은 올 1월 5일 결혼식을 올리고 다음 날 태릉선수촌으로 복귀했다. 기념일 한 번 챙기지 않던 무심한 남자는 3월 14일 사탕바구니를 아내에게 안겼다. 홍삼, 녹용 등을 챙겨주시는 장모님의 사랑에도 보답해야 한다. ○징크스 복싱계에서는 “선수가 인터뷰를 하면 메달을 못 딴다”는 징크스가 있다고 했다. 미안한 마음에 “괜찮겠냐?”고 물었더니 “복싱이나 복싱선수나 떨어질 곳이 어디 있겠냐?”고 반문한다. “어차피 저는 복싱을 떠나서는 못 살아요. 제게는 올림픽 징크스보다 복싱을 살리는 게 더 중요합니다.” 복싱을 한마디로 정의해달라는 질문에 “복싱은 마약”이라는 답변을 내놓은 이 남자, 확실히 복싱에 흠뻑 젖어있었다. 태릉=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