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밭도, 눈밭도…보드만 타면 행복하다는 청년

입력 2018-02-06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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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노보드의 희망’ 이상호는 고향땅에서 펼쳐지는 2018평창동계올림픽을 그 누구보다 학수고대해왔다. 반드시 금메달을 따 그간의 부진을 만회하는 한편 아낌없는 지원을 통해 자신을 격려해준 주변의 기대에 보답하겠다는 일념뿐이다. 고향의 배추밭을 슬로프 삼아 스노보더의 꿈을 키워온 ‘배추보이’의 힘찬 비상이 주목된다. 원주 |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항상 환한 미소를 띠던 얼굴이 이날만큼은 유독 밝지 못하다. 기나긴 강행군에 지친 탓일까. 가장 중요한 무대를 앞두고 안쓰러운 걱정이 들려던 찰나, 한껏 굳었던 얼굴이 금세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바뀐다. 그간 수도 없이 탔을 ‘보드’라는 단어가 나온 뒤부터다. 쉬고 있어도 눈밭이 그립다는 청년, 이상호(23·한체대)다.

2016~2017시즌 혜성처럼 나타나 한국스노보드의 희망으로 떠오른 이상호는 사실 ‘배추보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고향인 강원도 정선에서 고랭지 배추밭을 슬로프 삼아 스노보더의 꿈을 키운 일화 덕분이다. 그렇게 십여 년이 흘렀다. 해맑게 썰매를 타던 소년은 2017삿포로동계아시안게임 2관왕(평행회전·평행대회전)을 거쳐 이제 2018평창동계올림픽에서 사상 첫 설상종목 메달을 노리는 듬직한 청년이 됐다.

대회 개막을 정확히 일주일 앞둔 지난 2일 스포츠동아와 만난 이상호는 “우리나라 그것도 고향에서 올림픽이 열린다. 그동안 참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이번 대회에서 반드시 금메달을 따내 많은 분들께 보답하고 싶다”며 당차게 각오를 다졌다. 그러면서도 “하필 이번 올림픽 경기 일정이 다소 뒤쪽에 잡혔다. 대회가 일찍 끝나면 관심 있는 타 종목 경기를 찾아 응원을 하려고 했는데 아쉽게 됐다”면서 여느 대학생과 다르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남자 스노보드대표 이상호.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슬럼프는 걱정하지 마세요.”

사실 이상호에게 이번 2017~2018시즌은 아쉬움의 연속이었다. 지난 시즌 보여줬던 가파른 상승세가 한 풀 꺾였기 때문이다. 올림픽 전초전 성격이 짙었던 2017~2018 국제스키연맹(FIS) 월드컵에서 거둔 최고성적은 7위. 일각에서 걱정을 품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이상호는 “최근 성적이 좋지 못해 주변에서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낸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아쉬운 장면도 많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있다. 어차피 월드컵이 아닌 올림픽에 모든 초점을 맞춘 상태다. 다만 여러 조건이 잘 따라주지 않으면서 메달권에 진입하지 못했을 뿐”이라며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최근 부진이 실망스러울 법도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되레 “쉬어야할 때 쉬지 못했다. 남은 기간 컨디션 향상에 주력하면 큰 문제는 없다”며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던 취재진을 안심시키는 의젓한 자세까지 보였다.

그렇다면 부진 이유로 언급한 ‘여러 조건’이란 무엇을 뜻할까. 이상호는 “알파인스노보드의 경우 출발 순서와 대진표, 코스, 슬로프 상태 등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많다. 그런데 이번 시즌은 유독 이러한 조건들이 나와 맞지 않았다. 운이 따르지 않았다”며 부진 이유를 설명했다.

실제로 이상호가 나설 스노보드 평행대회전은 두 선수가 양 옆 코스에서 1대1 대결을 벌여 승자를 가린다. 따라서 대진 상대와 기문 위치, 코스 설질(雪質)에 따라 기록이 확연하게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알파인스노보드의 최대 변수이자 관전 포인트로 꼽히는 대목이다. 이상호 역시 이러한 벽을 넘어서야 메달을 손에 쥘 수 있다.

남자 스노보드대표 이상호. 원주|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 “쉬고 싶어도 보드가 눈에 밟혀서요.”

이날 이상호는 강원도 원주 시내에서 성화 봉송을 마치고 돌아온 뒤 인터뷰에 임했다. “솔직히 말하면 성화 봉송 주자가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도 설¤다. 그런 영광이 나한테도 찾아올 줄 몰랐다”면서 환하게 웃고는 “그래도 아직 올림픽 분위기가 실감나지 않는다. 동료들과 함께 합숙을 시작해야 느낌이 올 듯하다”고 말했다.

성화 봉송이 더욱 뜻 깊었던 이유는 행사 장소가 고향인 강원도였기 때문이다. 이상호는 “따로 의미부여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이번 올림픽이 내겐 특별한 무대”라면서 “그렇다고 부담감 때문에 훈련을 못할 정도는 아니다. 이전처럼 똑같이 준비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중요한 무대를 앞두고 깊은 속마음도 내비쳤다. 그간 받은 사랑을 보답하고 싶다는 진심이었다. 이상호는 “사실 이번 올림픽 무대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덕분에 비인기 종목임에도 부족하지 않은 지원을 받으면서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제는 올림픽 금메달로 이러한 도움에 보답하고 싶다”고 진솔하게 말했다.

이상호는 8일부터 17일까지 하이원리조트에서 동료들과 함께 몸을 만들고, 18일부터 휘닉스파크에서 본격적인 올림픽 체제에 들어간다. 평창선수촌 입촌 대신 이곳을 베이스캠프로 정한 이유는 익숙한 환경에서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다만 최근 강행군을 펼친 만큼 합숙 전까지 계획은 철저한 휴식이다. 이날 인터뷰에서도 유럽 원정으로 인한 시차적응을 끝내지 못해 피로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인터뷰를 마친 뒤 돌아온 이상호의 답이 걸작이다. 쉬다가도 좀이 쑤신다며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보드를 타겠다고 한다.

“주위에선 제발 쉬라고 하죠. 그런데 어쩌겠어요, 보드가 너무 좋은데….”

원주 | 고봉준 기자 shutout@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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