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V4…한국야구 환희와 눈물의 추억] 대만·일본에 져 동메달…‘도하참사’로 기억돼

입력 2014-09-18 0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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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대표팀은 2006년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그해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4강 신화를 썼지만 6개월 뒤 열린 도하아시안게임에서 한수 아래로 평가받은 대만과 일본에게 내리 경기를 내주며 동메달에 그쳤다. 스포츠동아DB

3. 2006 도하아시안게임

야구가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처음 채택된 것은 1994히로시마대회였다. 당시 한국은 대학선수 위주로 대표팀을 꾸려 대회에 나섰지만 결승전에서 일본에 5-6으로 패하면서 초대 챔피언 등극의 꿈이 무산됐다. 이후 1998방콕아시안게임에서 한국야구사상 최초로 프로와 아마추어 선수가 혼합된 드림팀을 구성해 첫 금메달을 수확했고, 2002부산아시안게임과 2010광저우아시안게임까지 3차례 금메달을 획득했다. 2006도하아시안게임에서는 동메달에 그쳤다. 스포츠동아는 아시안게임 사상 4번째 금메달 사냥에 나서는 한국야구 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하면서 1998방콕아시안게임부터 2010광저우아시안게임까지 4회에 걸쳐 환희와 눈물의 순간들을 더듬어본다.

이승엽·김동주 빠진 전원 국내파 선수
병역특례 몰입된 팀 구성에 아쉬움 커


참사. 국어사전에서 뜻을 찾아보면 ‘비참하고 끔찍한 일’이라는 풀이가 나온다. 전쟁 혹은 재난에나 쓰일 단어다. 평생 만나고 싶지 않은 말이기도 하다.

많은 야구팬들은 2006도하아시안게임을 ‘도하참사’로 기억한다. 그 패배가 얼마나 충격적이기에 참사라는 표현으로 기억될까.

2006년 3월 한국야구는 메이저리그와 일본프로야구, 쿠바 등 사실상 처음으로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모여 치른 국가대항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4강에 오르는 기적을 연출했다. 김인식 감독이 이끈 대표팀이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모인 미국 대표팀을 꺾고 4강에 진출하자 미국 언론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이들인가?’(Who are these guys, anyway?)는 표현을 쓰며 놀라워했다. 이전까지 한국은 마이너리그 더블A와 트리플A 중간 정도 실력을 가졌다고 평가됐지만 국가대표팀이 세계 정상에 도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러나 불과 6개월 후 세계 최정상급 한국야구는 카타르 도하에서 큰 수모를 겪는다. 도하아시안게임 야구대표팀 사령탑은 현대 김재박 감독이 맡았다. 2003년 아테네올림픽 예선으로 치러진 삿포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참패한 김재박 감독은 명예회복을 위해 대표팀 사령탑을 자처했다. 2005∼2006시즌 연속 우승을 차지한 선동열 삼성 감독이 유력한 후보였지만 김재박 감독에게 명예회복 기회를 주자는 야구계의 여론이 강했다.

선수선발은 WBC와 달리 전원 국내파로 구성했다. 특히 병역미필자 위주의 구단 안배 성격이 짙었다. 2014인천아시안게임 대표팀 명단 발표 직후 일어났던 논란과 비슷했다. 다만 당시에는 WBC 4강의 잔향이 크게 남아있어 비관론은 많지 않았다.

대표팀은 WBC에서 부상당한 ‘국가대표 4번 타자’ 김동주가 빠졌고 2006년 요미우리에서 첫 시즌을 보낸 이승엽도 참가하지 않았다. 홍성흔과 구대성 등 대표팀의 주축 멤버였던 베테랑들도 부상으로 참가하지 못했다. 일부에서 ‘이 전력으로 대만을 이기기 힘들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김재박 감독은 팀워크와 세밀한 작전야구로 이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11월 13일 소집된 대표팀은 롯데, LG와 연습경기를 치르고 카타르 도하로 향했다. 11월 30일 대만과 첫 경기는 단일리그로 치러진 대회 방식에 따라 사실상 결승전이었다.

한국 선발은 시즌 10승8패 방어율 2.78을 기록한 롯데 손민한이었고 이용규와 정근우가 테이블세터, 이병규, 이대호, 이진영, 박재홍, 장성호 등이 타선을 이뤘다. 대만은 LA 다저스 소속 좌완 궈홍즈였다. 한국은 손민한이 3이닝 무실점으로 초반을 막고 2회와 3회 득점 찬스를 잡았다. 그러나 2회 번트 작전이 실패했고 3회에도 1사 2루에서 연속 삼진을 당했다. 손민한이 4회 천롱지에게 솔로홈런을 맞고 천진펑, 린즈성에게 연속 안타를 허용해 2실점하며 분위기가 흔들렸다. 손민한은 5회에도 다시 홈런을 맞았다. 타선은 4회말 이대호의 3루타, 이진영의 적시타로 1점을 따라 붙었지만 연이은 희생번트 실패, 박재홍과 장성호의 병살타로 대량 득점에 실패하며 결국 2-4로 패배를 당했다.

12월 2일 2차전에서 한국은 사회인야구와 대학선수들로 구성된 일본에 7-10 대패를 당하며 더 큰 충격에 빠졌다. 먼저 4점을 올렸지만 선발 류현진이 3회 초노 히사요시에게 2타점 2루타, 사이고 야스유키에게 2점 홈런을 맞는 등 완전히 무너졌다. 타선이 힘을 내며 7-7 동점에 성공했지만 9회말 오승환이 투구수 55개로 한계에 다다른 상황에서 끝내기 3점 홈런을 맞으며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이후 필리핀 12-2, 태국 12-1, 중국 12-2로 승리해 동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대만과 일본전 패배는 야구계 전체를 큰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병역특례에 지나치게 몰입된 선수구성과 안일한 준비과정, 선수들의 정신력 등이 모두 도마에 올랐고 이는 이후 2008베이징올림픽, 2010광저우아사인게임 선수선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rushl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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