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황정민 “내 바닥 드러낸 ‘흑금성’…촬영장에서 도망치고 싶었죠”

입력 2018-08-07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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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황정민은 8일 개봉하는 영화 ‘공작’을 촬영하며 “나의 ‘바닥’이 드러나는 걸 봤다”고 털어놓았다. 도망치고 싶을 만큼 연기 과정이 혹독했지만 “바닥을 찍고 올라오면서” 다시 열정을 불태울 기운을 되찾았다고 했다.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 북한 공작 실화 바탕 영화 ‘공작’ 주연 황정민

‘공작’ 시나리오 보자마자 ‘헐!’
직접 본 흑금성, ‘벽’ 앞에 놓인 기분
총격전 대신 고도의 심리전 엄지척
김정일 만나는 장면 심장 터질뻔


한 우물만 30년 가까이 판 베테랑 배우라고 해도, 촬영장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나보다. 배우 황정민(48)은 영화 ‘공작’을 촬영하면서 그런 마음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원하는 만큼 인물과 상황이 표현되지 않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짜 촬영장에서 도망칠 수는 없는 일. 황정민은 “나를 옥죄는 과정 속에서 바닥을 찍고 올라왔다”고 했다. 어느 때보다 혹독한 과정을 거친 덕분일까. 진부할 수 있지만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생겼고,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도 동했다. ‘공작’ 촬영을 끝내자마자 셰익스피어의 연극 ‘리차드 3세’ 무대로 향한 이유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나의 ‘바닥’이 드러나는 걸 봤으니까. 그동안, 참, 나름대로 잘해보자고 해왔지만 그게 관성이 됐나보다.”

대체 ‘공작’(제작 사나이픽처스)은 어떤 영화이기에 관록의 배우를 이토록 고통으로 밀어 넣었을까. 황정민 말고도 함께한 이성민, 주지훈도 이구동성 “힘들었다”고 토로하는 영화가 8일 관객 앞에 공개된다.

영화 ‘공작’ 속 황정민.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 “혼자만 알기에는 입이 근질근질”

황정민은 윤종빈 감독으로부터 ‘공작’ 시나리오를 받아 읽은 뒤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당시의 기분을 단 하나의 음절로 표현한다면 “헐!”이다. 영화의 배경인 1990년대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여긴 터라 놀라움은 컸다. “나만 알고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서 입이 근질근질 했고, 약간의 사명감도 생겼다”고 했다.

영화는 1993년 북한의 핵 개발로 인해 한반도에 위기가 고조되면서 시작한다. 정보사 소령 출신으로 안기부에 스카우트된 박석영(황정민)은 흑금성이라는 암호명으로 북핵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북한 내부로 잠입한다.

박석영이 대북 사업가로 위장해 김정일을 만나 사업권을 따내는 과정, 1996년 총선 직전 북한이 일으킨 판문점 무력시위,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김대중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안기부가 주도한 북풍 공작 사건은 영화를 이루는 주요 뼈대이자, 전부 실제 일어난 일이다.

황정민은 당시 북한을 상대로 첩보전을 벌인 스파이 박채서 씨를 모티프로 한 인물을 맡아 이야기를 이끈다. 촬영 전 황정민은 박 씨를 직접 만났다. 오랜 기간 정체를 숨기고 첩보전을 벌인 인물과의 만남은 그대로 황정민을 자극했다.

“실화 바탕의 영화를 종종 해왔어도 직접 그 인물을 만난 적은 없다. 혹시 실존인물이 가진 이미지에 내가 갇히게 될까봐 거리를 뒀다. 하지만 이번엔 만났다. 대체 어떤 신념으로 일련의 일을 해왔는지 궁금했다. 눈을 마주봤지만 그 마음이 읽히지 않았다. 어떤 ‘벽’에 앞에 놓인 기분이었다.”

촬영을 시작하고 나서도 늘 조심스러웠다. 영화 소재도 그렇지만, 영화 제작에도 관여해 블랙리스트를 만든 박근혜 정권 당시 촬영을 시작한 탓이기도 했다. 황정민은 “촬영을 할 때는 북한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서 우린 모두 겁을 먹고 있었다”며 “농담 삼아 ‘이러다 잡혀가는 거 아니냐’ 하다가도, 우리 아니면 누가 만들겠냐고 다독이면서 미친 듯이 했다”고 돌이켰다.

영화는 총격전도, 추격전도 없다. 고도의 심리전으로 이룩한 밀도 있는 첩보전이다. 감독은 황정민에게 ‘모든 대사를 액션장면처럼 표현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앞에 놓인 숙제가 끝 없이 이어졌다.

“겉으론 도드라져 보이지 않으면서도 발밑에선 양날의 칼이 날뛰게끔, 이중삼중으로 표현하는 과정이었다. 김정일을 만나는 장면에선 거대한 세트가 주는 위압감에 압도당하기도 했다. 김정일(기주봉)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연기할 땐 정말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하하!”

배우 황정민.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 “1997년, 맏아들 책임 고민하던 시기”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1997년은 황정민에게 “IMF를 보내고 있던, 너무 힘든 시기”로 기억되고 있다. “연극을 접고 집안 장남 역할을 하면서 가족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때였다. 돈 버는 일이 삶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부모님도, 동생도 뿔뿔이 흩어져 지내고 있었다. 다같이 모여 사는 것, 그 목표뿐이었다. 나만 좋으려고 연극을 할 순 없었다. 그래서 연극을 접고, 해외에서 사업하는 친구에게 가려고 모든 준비를 마쳤다.”

바로 그때, 앞서 오디션을 봤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연락이 왔다. 이전까지 해 본 적 없는, 비중이 상당한 역할을 맡아달라는 연락이었다. 황정민은 “그 영화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나는 어디에서 열심히 돈을 벌고 있을지 모른다”며 웃었다.

황정민은 최근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 팬이 부쩍 늘었다. 얼마 전 한 온라인 생중계 토크쇼에 나와 요즘 유행하는 ‘급식체’(급식을 먹는 10대 청소년이 사용하는 문체) 퀴즈를 풀다가 내놓은 황당한 답변이 화제가 됐기 때문이다. ‘갑분싸’라는 단어 풀이를 놓고 “갑자기 분뇨를 싸지른다”고 답하는 장면을 담은 영상이 온라인에서 히트를 쳤다. 원래는 ‘갑자기 분위기 싸해진다’라는 의미다.

“방학이라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을 학원에 데려다 주고 있는데, 아들 친구들이 ‘아저씨, 갑분싸’라면서 웃더라. 나는 그 단어를 처음 들어봤다. 그런데 아들은 오히려 ‘분뇨’가 무슨 뜻이냐고 묻고. 요즘 아기들에게 책을 주면 아이패드 넘기듯이 손가락을 옆으로 민다지 않나. 그런 세상을 나는 거부하고 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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