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과 내가 만나는 곳, 스페인 성지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입력 2014-08-04 14: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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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설 속 주인공이 그러하듯, 소설의 결말을 결정하는 엄청난 복선은 사소한 사건이나 사물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다. 23살, 내 인생의 첫 전환점이 된 성지 순례길 ‘Camino de Santiago’(이하 산티아고 길)와의 만남은 작은 책 한 권에서 시작되었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읽으면서 정답도 없는 근원적인 문제를 거듭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작가가 산티아고를 걸은 후에 느낀 것들을 이 책에 투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를 괴롭히던 철학적인 질문의 해답을 얻기 위해 산티아고 길에 오르기로 결심했다.

산티아고 길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명인 야곱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북서쪽의 ‘산티아고 데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와 프랑스 생장(Saint Jean)을 잇는 800km 길이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조개 껍질이 달린 지팡이 하나에 몸을 의지하고 이 먼 길을 걸어왔다고 한다. 다분히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곳이지만, 크게 개의치 않고 순례를 준비했다.

머리 위에 해가 솟아있는 시간이 가장 길었던 어느 여름 날, 프랑스 국경 끝자락인 생장에서 순례자로써의 첫 걸음을 뗐다. 오랜 스페인 유학생활로 작렬하는 태양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건만, 고르지 못한 길과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배낭 때문인지 걷기 시작한지 세시간도 안돼서 체력이 바닥났다. 순례길에 오르기 2달 전부터 체중 감량과 운동으로 기초체력을 다졌는데, 생각보다 산티아고 길은 쉽게 나를 받아주지 않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그렇게 피레네 산맥을 넘은 첫날은 온통 후회와 자책으로 가득했다.

새벽부터 순례를 준비하는 부지런한 순례자들의 움직임 때문에 덩달아 일찍 잠에서 깼다. 순례자들을 위한 저렴한 숙소인 ‘알베르게’는 한방에 보통 20개의 침대가 빼곡하게 줄지어 있기 때문에, 굳이 잠귀가 밝지 않은 사람이라도 일찍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첫날부터 거친 산맥을 지났으니, 오늘은 평탄한 길을 만나 목적지인 ‘팜플로냐’에 빠르게 도착할 수 있으리란 막연한 기대를 하며 길을 나섰다.

순례 이튿날부터 나를 산티아고에 푹 빠지게 한 것은 ‘타인이 만드는 소리’ 였다. 갈림길 마다 행선지를 알리는 노란 조개 껍질 표시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새벽 거리에서 앞 사람의 발소리와 조개 껍질이 부딪혀 내는 소리는 안내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푸른 새벽의 어둠이 걷히고 순례자들이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낮이 되면, 서로의 안녕을 묻는 ‘Buen Camino(즐거운 순례 되세요)’ 인사로 순례길이 시끄러워 졌다. 낯선 이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니, 점차 수월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며칠 후,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익히 알려진 스페인의 리오하(La Rioja) 지역에 도달했다. 하루의 순례를 마친 후, 목적지에 도착하여 마시는 3유로짜리 싸구려 와인은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콤헀다. 술에 취해 조금은 느슨해진 몸과 마음으로 다른 순례자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거웠다. 국적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다소 허무하고 의미 없는 이야기에도 자지러질 듯이 웃었다. 낮에는 머리를 비우며 걷고, 밤에는 침낭에 몸을 파묻는 순간까지 웃고 떠들며 모든 걱정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점점 산티아고 길에 익숙해져 갔다.

순례자들의 여권이라고 불리는 크레덴시알(Credencial)의 빈 공간이 어느덧 반도 남지 않았다. 어린 시절 포도송이가 그려진 종이에 보랏빛 포도알 스티커를 모으는 기분이 들어, 성당을 발견할 때 마다 크레덴시알에 도장을 찍었다. “저 오늘도 이만큼이나 걸었어요”, “오늘은 다른 순례자를 도와줬어요” 라며 자랑 섞인 기도를 했다.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비교하며 끝도 없이 나 자신을 갉아먹던 내가, 온전히 나 혼자와의 싸움을 이겨내고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크레덴시알의 여백이 조금씩 지워질 때 마다, 자존감은 차곡차곡 채워졌다. .

길을 떠난 지 한 달이 조금 지날 무렵,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stela)에 도착했다. 조금은 아쉬운 마음에 걸음을 늦추며 마지막 순례길을 미뤄왔건만,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숙소에 배낭을 내려놓기 전에, 산티아고 대성당을 찾았다. 성당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나를 산티아고 길로 이끌었던 파울로 코엘료 作 ‘연금술사’의 한 구절이 생각했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나의 소망이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와 준다’는. 아무도 내 소망은 들어주지 않는다고 불평했지만, 사실은 내가 온 우주는 커녕 한 사람의 마음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간절함이 부족했다는 것을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 800km를 걷고 나서야 비로소 간절함의 힘을 깨달았다.

정리=동아닷컴 고영준 기자 hotbas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취재 협조 및 사진=모두투어 자료 제공(전화 1544-5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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