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의 ‘자전거 식객’] 상큼~즉석 굴무침에 달콤~군호박고구마

입력 2011-05-0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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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보령~군산<상>
상큼한 갯내음 입안 가득 ‘무창포 굴무침’


허화백 급브레이크 밟게 만든 할머니 굴무침
고추장에 쪽파만 넣어도 바닷가의 낭만이 되고

허기 참으며 달리다 국도에서 만난 호박고구마
높은 당도에 후한 인심까지…이것이 꿀맛이네!

여행길에 오른 이들에게 쾌청한 날씨는 축복과도 같다. 같은 장소, 같은 길이라도 기상에 따라 여행자가 느끼는 정취는 다르게 마련. 물론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리는 날도 나름의 운치는 있지만 자전거 식객들처럼 먼 거리를 두 바퀴로 달려야 하는 입장에서는 맑은 하늘과 적당한 기온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4월 홍성∼보령 구간에서 엄청난 황사에 숨도 제대로 못 쉰데 이어 이튿날엔 황사가 잔뜩 섞인 흙비까지 맞았던 우리로서는 투어를 앞두고 날씨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대천에서 시작된 자전거 전국일주 제8차 투어가 있던 날, 하늘은 소망대로 마치 가을처럼 맑고 높고 푸르렀다. 전날까지 내린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대기 중의 먼지를 말끔히 가라앉혔고 영롱한 햇살이 구슬처럼 부서지며 온몸을 어루만진다.

대천해수욕장을 거쳐 남포방조제에 올라선다. 길은 마을과 논밭 사이로 이리저리 꺾였으나 지나는 자동차가 거의 없고 언덕이 부드러워 봄날의 자전거는 콧노래와 함께 들녘 가득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속에서 물처럼 편안히 흐른다.

용두해변을 지나 웅천 무창포. 지금까지 안면도에 막혀 있던 바다가 이제 서쪽으로 끝간 데 없이 열려 부드러운 바닷바람에서는 바다 건너 먼 나라의 내음이 느껴진다. 무창포 해변의 모래밭은 봄볕 아래 눈이 부셔 선글라스를 끼지 않으면 정면으로 바라보기 어려웠다.


막걸리와의 환상궁합 무창포 굴무침, 봄날 바닷가의 압축된 낭만

자전거 대열을 이끌고 앞서 달리던 허영만 대장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원래의 색깔을 알 수 없을 만큼 빛이 바랜 파라솔 아래 한 할머니가 펼쳐놓은 즉석 굴무침 좌판.

좌판에는 새끼손가락 끝마디 크기의 굴이 여러 개의 보시기에 나뉘어 담겨 있다. 주문을 하면 플라스틱 접시에 한 보시기의 굴을 옮겨 담은 뒤 고추장 한 숟가락을 척 올리고, 그 위에 잘게 썬 쪽파를 한 움큼 뿌려 내주는 소박한 해변의 굴 전문 레스토랑이다.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린 듯 좌판에 둘러앉았고, 잠시 후 할머니께서 건네주는 막걸리와 굴무침 쟁반을 받아들었다. 할머니가 새벽 썰물 때 갯바위에서 따온 굴의 향은 혀 위에서 느리고 아스라하게 퍼졌고 씹을 때마다 상큼한 갯내음으로 입안을 가득 채운다.

“이런 것을 이런 곳에서 맛본다는 것, 아무에게나 허용된 호사는 아닐 거야. 그치?”

두 번째 막걸리 잔을 채우던 허영만 화백이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말해서 무엇하랴. 목욕탕에서 쓰는 납작한 앉은뱅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은 그저 굴이 아니라 봄날 바닷가의 압축된 낭만이었는데 이 소박한 낭만 앞에서 속세의 부귀영화는 초라하고 무의미했다. 무창포 굴무침 할머니의 좌판 앞에서 등에 내리쬐는 햇살은 따사로웠고, 막걸리는 차가워서 자전거 나그네들은 행복했다.


대천∼춘장대 구간, 해안 갯마을의 정취 물씬

무창포에서 해안을 따라 독산을 거쳐 부사방조제로 질러나갈 수 있는 길을 찾아보았으나 중간에 해안경비대가 가로막고 있어 불가능. 식객들의 여정은 607번 도로를 따라 이어졌다.

부사방조제를 거치는 대천∼춘장대 구간은 비록 아스팔트 도로지만 교통량이 워낙 적어 서해안 갯마을의 한적함을 만끽할 수 있다.

계획적으로 조성한 자전거도로들은 안전하고 깔끔하지만 아무래도 인위적인 느낌이 강하지만 지금 달리는 이 길은, 삶의 향기가 물씬한 민촌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들을 휘감으며 저 홀로 흐른다.



해변의 레스토랑서 혀가 호강하네!

칼로리 보충하며 드디어 도착한 서천 칼국수집
소문만 믿고 왔다가 반도 못 먹고 젖가락 스톱!

8개월만에 도 경계선 넘어 첫 대면한 전라북도
새만금 방조제가 나그네들을 질리게 만드네


이 아름다운 길은 춘장대를 지나 서면으로 접어들 때까지 우리를 편안하게 실어다줬다. 비인에 이르자 21번 국도가 합류하며 길은 넓어지고 자동차도 많아진다. 점심을 먹기로 한 서천까지는 아직 15km쯤을 더 가야하는데 시간은 벌써 오후 1시. 그동안 먹은 것이라곤 무창포 굴이 전부여서 배가 몹시 고팠지만 인터넷 맛집으로 소개된 서천의 S칼국수를 먹기 위해 그냥 달리기로 했다.

허기를 참으며 차들이 쌩쌩 달리는 2차선 도로를 한참을 달리다보니 난데없는 고구마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고구마 냄새의 발원지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길가에 호박고구마를 파는 임시 천막이 있는데 그 한쪽에서 드럼통에 고구마를 굽고 있다.

노점상분들은 인심이 후해서 자전거를 타고가다 들르면 ‘힘쓰는 사람들이니까 많이 드시라’며 대개 돈보다 더 많이 주곤 하는데 비인에서 만난 군고구마 아저씨도 마찬가지였다. 5000원에 다섯 개라는 군고구마를 곱배기인 10개나 내준다.

배가 고팠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군고구마의 맛은 아찔할 만큼 기가 막혔다.

마치 잘 익은 감처럼 속까지 물컹했는데 당도가 꿀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높다. 실제로 손에 묻으면 진짜 꿀을 만졌을 때처럼 찐득할 정도.


큰 기대만큼 진한 아쉬움 남긴 서천 S칼국수

고구마 하나씩으로 부족한 칼로리를 보충한 나그네들은 서천까지 날듯이 내달렸다.

기대하던 서천 S칼국수.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실망. 기계면에 굴을 넣고 달걀을 풀어 고춧가루를 뿌려 내왔는데 어찌된 셈인지 굴 특유의 향이 전혀 없고 라면에 물을 탄 듯 밍밍했다.

아침부터 50km를 달려왔고 끼니때를 훨씬 넘겼으니 어지간하면 맛있게 느껴지는 게 정상일터이나 절반도 못 비우고 젓가락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마다 맛의 평가 기준이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소문난 음식은 개인의 호불호를 떠나 보편타당한 그 어떤 내공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각종 미디어를 통해 음식 소개가 넘쳐나는 요즘, 때로 소문만 요란하고 과대평가된 것들이 있을 수 있는데 서천에서 바로 그런 경우를 만난 것이다.

많이 남아 식은 칼국수를 바라보며 우리는 낮에 먹었던 무창포 해변의 할머니 굴무침, 비인의 군고구마를 떠올렸다. 요기는 했으나 헛헛한 속을 달래지 못한 채 금강하구 둑을 건너 군산에 이르렀다. 이제 전라북도. 지난해 9월 강화도를 떠난 후 경기도를 벗어나고 충청남도를 관통한 뒤 8개월 만에 또 다시 도 경계선을 넘은 것이다. 자전거여행으로는 첫 대면인 전라북도는 보령에서부터 이미 먼 길을 달려온 나그네들에게 만만찮은 과제를 안겼다.

대한민국 지도를 바꿨다는 새만금 방조제! 방조제로는 국내 최장인 새만금의 둑길은 둑 너머 끝이 가물가물해서 살짝 지친 일행을 질리게 만들었지만 대규모 항구와 공단이 밀집한 군산 쪽에서는 캠핑을 할만한 장소를 발견하기 어려워 내쳐 새만금을 넘어 변산까지 달릴 수밖에….

직선으로 달리는 방조제 길은 자전거를 타고 가기엔 무미건조하다. 더구나 그동안 건너온 방조제 중 최장거리가 시화방조제(약 12km)였는데 새만금은 그 3배에 가까운 거리다.

저녁이 되자 북서풍이 강해져 자전거가 휘청거릴 만큼 강력한 횡풍에 시달렸으나 다행히 둑길은 신시도를 기점으로 남동쪽으로 꺾여 뒷바람을 받으며 변산까지 1시간 40분 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

변산해수욕장에 잠자리 마련을 위해 텐트를 칠 때 해는 완전히 바다로 잠겨 플래시라이트를 켜야 했다.

사진|이진원 포토그래퍼
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timbersmit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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