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생’으로돌아온마해영의야구인생‘종점은부산’

입력 2008-04-0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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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해영(38)이 그라운드 한쪽에 몸을 풀러 나왔다. 롯데와 SK의 경기가 열린 2일 부산 사직구장, 5회가 끝난 직후였다. 누군가 그를 발견하고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소리는 점점 커졌다. “마해영! 마해영!” 이 날 벤치를 지키던 마해영의 얼굴에 쑥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7회초가 끝났다. 갑자기 1루 쪽 관중석이 환호로 뒤덮였다. 덕아웃에 앉아있던 마해영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전광판에 그의 얼굴이 비쳐지고 있었다. 마해영은 또다시 멋쩍게 손을 흔들었다. “경기도 못 나가면서 이렇게 환영 받은 선수가 또 있을까요.”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마해영이 부산으로 돌아왔다. 떠밀리듯 대구행 기차를 탄 지 8년 만이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3일 오후, 사직구장 근처에 새로 마련한 그의 집을 찾았다.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옛 롯데 유니폼을 입은 마해영이 한국시리즈에서 홈런을 치는 장면이다. 한쪽 벽면에는 마해영의 전성기를 증명해주는 트로피가 빼곡하다. 그 기록의 대부분은 단연 롯데다. 한때 연봉 4억원을 받던 마해영은 현재 연봉 5000만원을 받는 선수가 됐다. 하지만 부산은 그와 함께 행복했던 시절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웠던 고향에서 아름다운 마지막을 꿈꾸는 마해영은 지금 “너무나 행복하다”고 했다. ○뜨거운 환대 “눈물날 만큼 고마워” “우리 롯데, 가을에 야구 좀 하게 해 주이소.” 감기 기운을 느낀 마해영이 집 근처 약국을 찾았다. 약사는 약만 건네고 돈은 받지 않았다. 운동장에서 좋은 플레이를 보여달라고, 그게 약값이라고 했다. 마해영은 “이게 바로 부산 정서”라면서 “하루하루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구단 홈페이지에 ‘마해영 복귀 릴레이’를 펼쳤던 팬들. 그래도 이 정도까지 환대를 받을 줄은 몰랐다. 사직 개막전 때 3만 관중을 향해 큰 절을 올렸던 것도 말로는 다 표현 못할 고마움 때문이었다. ‘이제 마해영은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반신반의하던 구단도 팬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자 ‘잘 데려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산으로 막 전학 온 아들 낙준(11)과 낙현(10)은 ‘마해영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부회장과 반장에 당선됐다. “아직 애들한테 도움이 되는 아빠라고 생각하니 어깨가 으쓱하던데요.” 초등학생들이 마해영의 이름 석 자를 안다는 것도 부산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자다가도 웃음이 나오는 나날들이다. ●부산이 마해영을 반기는 이유 마해영은 롯데가 ‘잘 나가던’ 시절의 마지막 상징이다. 1995년 화려하게 데뷔한 그는 1999년 펠릭스 호세와 함께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다. 그 때가 절정이었다. 그런데 마해영이 팀을 떠난 2001년부터 롯데의 성적이 곤두박질쳤다. 우연 치고는 기가 막히다. “그 때 워낙 강한 인상을 남겨서 팬들이 아직 기억해 주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엔 진짜 뭔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하시는 것 같고요. 저도, 팀도 팬들의 기대에 꼭 부응해야죠.” 무조건 포스트시즌이 열리는 가을에도 야구하겠다는 다짐, 그동안의 부진을 한번에 다 만회하겠다는 각오, 올해는 진짜 다르다는 자신감이 어우러졌다. 마음은 늘 롯데…3연속 꼴찌땐 속앓이도 ●원치 않았던 트레이드 롯데와의 이별은 2001년 시작됐다. 마해영은 프로야구선수협회 주축 멤버로 활동하다 삼성으로 트레이드됐다. 그 때 맞바꾼 선수가 지금은 돌고돌아 함께 뛰고 있는 김주찬이다. “일부 팬들은 제가 원해서 팀을 옮긴 거라고 잘못 알고 계세요. 하지만 저로서도 가슴 아픈 트레이드였어요. 그 때 주장을 맡고 있었으니 ‘설마’ 싶었는데, 결국 짐을 싸라고 하더라고요.”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스포츠신문에 나온 기록표를 볼 때면 자신도 모르게 롯데 선수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고 있었다. “내가 롯데 선수가 아니라는 게 실감나지 않았죠. 게다가 팀이 3년 연속 최하위를 하는 걸 보면서 마음도 아팠어요. 어디서든 늘 롯데가 잘 되기 만을 바랐거든요.” 2004년 삼성에서 FA(프리에이전트)가 됐을 때도 ‘혹시 다시 불러줄까’ 싶어 부산에 머물렀다는 마해영. 하지만 기다리던 전화는 오지 않았고, 그는 또다시 낯선 KIA 유니폼을 입었다. ●‘천덕꾸러기’ 생활, 그 종착역은 롯데 이후 4년이 그에게는 암흑기였다. 야구하면서 처음으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 ‘세대교체’라는 명분 앞에 가장 먼저 희생되는 건 마해영이었다. 특히 KIA에서 트레이드 형식을 통해 LG로 옮긴 뒤 생활은 상처투성이였다. 2006년 10월의 ‘방출 예고’ 해프닝 후에도 1군 11경기, 2군 10경기에 출전한 게 전부였다. 그야말로 ‘개점휴업’ 상태. 베테랑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방치해두는 상황이 아쉽기만 했다. “저만큼 야구한 사람도 이런 대접을 받는다면 다른 선수들은 어떻겠어요. 야구 선배들이 후배를 존중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막상 방출된 후에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은퇴하기엔 아직 힘도 남아있고 몸 상태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열정이 너무 컸다. 1980년 8월 17일. 야구를 처음 시작한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하는 그다. 대만 리그, 일본 2군, 미국 마이너리그까지 알아봤다. 그리고 나서 왕년의 톱스타에게 돌아온 롯데 입단 테스트 기회. “뛸 수만 있다면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꿈에 그리던 부산에 그렇게 돌아왔다. ●내 갈 길은 야구, 마지막 유니폼은 롯데 부산은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이다. 그리고 야구를 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 묻어있는 곳이다. 부산 대연 초등학교 시절, 유격수 마해영은 부산 시장이 주는 초등학생 타격상을 받았다. 1년간 타율이 5할4푼5리였다. 이 때 대학생 타격왕이 바로 롯데 한문연 코치. 시상식 먼 발치에서 지켜보던 인연이 한솥밥으로 이어졌다. 롯데 입단 후 1년도 꿈만 같았다. 입단하면서 받은 2억원(계약금 1억8000만원·연봉 2000만원)은 형편이 어려웠던 마해영에게 상상도 못할 거액이었다. 최동원∼박동희에 이어 롯데 사상 세 번째로 입단 기자회견을 가졌고, 데뷔와 동시에 4번타자를 꿰찼다. 프로 첫 안타를 때려낸 상대는 당대 최고의 스타 선동열. 그 때 롯데 홈관중은 100만명을 돌파했다. 마해영은 그 시절의 영광이 여전히 생생한 듯 했다. 올해도 꼭 그 때의 감동을 느껴보고 싶다고 했다. “출정식 때 (박)현승이가 그러더군요. ‘은퇴하기 전에 꼭 우승 반지를 끼고 싶다’고. 제 심정도 똑같아요. 여기서, 부산에서 꼭 우승하고 싶어요.” ‘마포종점’은 ‘부산’이라는 듬직한 선언이기도 하다. “다시 돌아오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이제는 정말 롯데 유니폼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요. 팀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그 순간까지, 몸 관리 잘해서, 좋은 모습 꼭 보여드리고 은퇴하고 싶습니다.” 마해영이 활짝 웃었다. 부산=배영은 기자 yeb@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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