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황손’이석“돈에찌든우리국민노래로정화시킬것”

입력 2008-07-1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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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일곱에다시잡은마이크…내달발표‘아!숭례문’부르다보면저절로눈물이
“제가 고종황제 손자요. ‘비둘기 집’ 부른 가수였잖소.” 조선의‘마지막 황손’이석(67) 씨를 소낙비가 내린 16일 인사동 찻집에서 만났다.“어디서 많이 뵌 분 같다”는 주인아주머니의 얘기에 “고종황제의 손자, 마지막 황손”이라며 한껏 웃어 보였다. 이석 씨는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의 아들로, 현재 전주황실문화재단에서 황실살리기운동과 역사바로세우기운동을 하고 있다. 전주대학교에서 교양국사도 가르치고 있다.“60년 전 내가 상궁들한테 도시락을 먹은 사람이야”라고 하면 학생들은 만화 같다며 신기해한다. 그래도 역사에 열의 있는 제자는 무조건 100점을 주는 점수에 후한 교수님이기도 하다. ‘비둘기집’ 노래로 대중들에게 익숙한 ‘황손’은 8월 초부터 음반 활동을 재개한다. 두루마기를 입고 방송에 출연해 열심히 노래를 알릴 생각이다.‘아! 숭례문’음반 후반 작업 때문에 전주에서 서울에 자주 올라왔다. 610년 동안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숭례문처럼, 그는 조상의 뿌리를 잊지 않으려고 분주히 활동한다. 군인, 승려, 가수 등 수많은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고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했지만, 시간을 되돌려도 ‘마지막 황손’으로 살고 싶다고 했다. 한국의 정통성을 살리는 데에 남은 인생을 걸겠다며 굳건한 표정으로 말했다. 최근 이완용의 손자를 잘못 만나 밥을 먹다가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했다.“네 할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를 죽인 것이라고…” 탄식을 하고 일어섰다. 함께 있던 동료는 “자네, 이제 과거를 잊고 살게나”라고 했지만, 마지막 황손은 과거를 결코 잊을 수 없다. 한국이 전통문화강국으로 거듭나는 날을 꿈꾸며, 오늘도 소명감을 안고 역사바로세우기운동을 하고 있다. 마치 전래동화 속의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어린 시절을 보낸 사동궁 자리에서 그는 구수하게 지난 시간을 들려주었다. - ‘아! 숭례문’ 노래는 … “친구가 노래를 줬어. 주부가요열창의 심사위원 심수천이 작곡하고, 현철 노래 만든 김동찬이 작사했어. KBS 어린이 합창단과 함께 부르고, 반주는 대금 부는 죽향 이생강 선생이 하는데, ‘아! 숭례문’ 하면 저절로 눈물이 나. 돈 벌기 위해서 ‘아! 숭례문’ 노래하는 게 아니라. 우리 국민을 순화시키기 위해서 하는 거야. 음악은 마음을 정화시키거든. 황금만능주의에 찌들어서 이상한 사람이 많아졌어.” -황실문화재단 활동은… “역사가 많이 격하돼 버렸는데, 1897년 10월 21일에 고종 할아버지가 우리나라를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으로 만들었어. 지금 조선호텔 원구단에서 하늘에 신고를 했거든. 그런데 일본인들이 그 자리에 여관을 만들었다고. 그게 조선호텔이야. 역사의식 있는 대통령이 나와서 그 호텔도 없애야 해. 내가 조선의 마지막 뿌리로 살아있는데, 항상 시간이 없다고 그래. 전라도에서 150평짜리 한옥을 만들어줘서 민박도 하고, 역사바로세우기운동도 하고 있지. 지금 덕수궁이 원래 경원궁이었어. 1919년 1월 21일 경원궁 함녕전(보물 820호, 고종황제 침전)에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이완용이 일본 천황한테서 가져온 독약을 식혜에 넣어왔는데, 그거 잡숫고 돌아가셨거든. 그 날 피 묻은 옷을 입고, 다 죽어가는 상궁이 집에 뛰어왔어. 덕수궁부터 여기 사동궁까지 달려온 거야. 아버님이 고종황제 둘째 아들 의친왕이야. 승하하셨다고 보고한 거지. 그때 아버님이 천도교 손병희 교수를 태화관에 모셔 놓고 33인을 결성했어. 3.1운동은 임금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촉발된 거야. 이런 걸 내가 잊을 수가 없지.” - 황손의 어린 시절은? “내가 1941년생이니까 해방될 때 5살이었어. 그 때 성북동 성낙원이라는 아버님 별장에서 살았어. 아버님이 매일 양주병을 들고 들어와서‘내가 죽어야지. 일본 놈들 내쫓아내야지’하며 막 우셨다고. 난 무서워서 도망가고 그랬어. 그러다 해방이 됐지. 그리고 안국동 별궁이라고 풍문고 뒤에서 전쟁을 맞았어. 그때 아버님은 낙선재에 계시다 부산으로 피난 가서 법륜사란 절 있는 자리에서 사셨어. 1955년 8월 15일, 안국동 별궁에서 일흔 아홉에 돌아가셨으니 장수하신 편이지. 조선왕조 임금 수명이 평균 서른다섯 살이래. 너무 짧아. 운동을 안 시켜서 그래. 나도 초등학교 다닐 때 상궁들이 뒤따라 와서 운동회 날 뛰려고 하면 ‘아니되옵니다. 뛰시면 아니되옵니다.’ 그러는 거야. 교장선생님이 날 대신해서 뛰어줬다니깐. 왕실법도가 그렇게 무서워. 자치기도 못하고, 소리도 크게 못 냈고. 젓가락, 숟가락 소리가 나면 큰일 나. 국도 소리 내서 먹으면 안 되고.” - 황손들은 음악적 끼가 많다? “10살 때 전쟁 중에 인민군이 내 독일제 하모니카를 가져갔어. 피아노처럼 예쁘게 생긴 거였는데, 그 하모니카 뺏기고 너무나 속상했지. 요새는 전주에서 거문고를 배워. 손가락이 아파 힘들어. 최인호의‘길없는 길’ 소설에도 아버님 거문고가 등장해. 수덕사 만공스님이 운현궁에 놀러왔는데, 아버님이 나라 뺏기고 약주 드시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대. 아버님한테 ‘전하, 수덕사 땅이 왕실 땅입니다. 불교 재산으로 주십시오’ 그러니 ‘오냐! 가져가라’하면서 사인을 해줬대. 그래서 만공이 아버님 불명을 만들어줬어. 만오, 늦을 만(晩)에 깨우칠 오(悟). 아버님이 ‘선물 하나 주고 싶다’하니 ‘거문고 주십시오’ 그러더래. 그게 고려 공민왕 때 거였어. 노국 공주랑 살 때 공주가 일찍 세상을 뜨니까 밤마다 슬퍼서 거문고를 뜯으신 거야. 경복궁 경회루에서 명성황후 할머니도 뜯고 그러셨대. 그 거문고가 700년 된 거지. 만공이 간곡히 요청해서. ‘밤중에 와라’ 그랬대. 상궁들이 포대기에 싸서 하수도 구멍으로 밤에 준 게 지금 수덕사에 있어. 내가 작년에 수덕사 성보박물관에 가서 봤어. 나전칠기로 만든 게 납작해. 은박을 씌워놨어요. 거문고 뒤에 아버지 글씨가 있어. 붙들고 울었지. ‘아버님 왔습니다’하며 주지한테 가져갈까 부탁했더니 안 된대. 만공이 준 구슬 염주를 가져와야 된대. 그게 만공스님의 선사 경허 스님 거래요. 거문고 배워서 일 년에 두 번씩 와서 뜯으라고 하기에 배우고 있어.” - 젊은 시절과 지금의 꿈?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가수를 했어. 원래 꿈은 외교관이라서 한국외대에 들어가서 스페인어를 배웠다고. 40년 만에 임금님을 다시 만들어놓은 나라가 스페인이야. 그 나라 관광대국으로 잘 살아. 국민들도 잘 뭉치거든. 그러다 미 8군 쇼 들어가서 가수 했는데, 먹고 사는 게 막히니까 결국 다 막혀버렸지만… 글쎄 큰 딸이 탤런트 한대서 족보에서 뺀다고 했어. 그냥 손녀딸 데리고 잘 살라고 그랬어. 먹고 사는 게 그러니깐… 난 월남도 다녀왔고, 절에도 들어갔고… 89년 이방자 왕비 장례식 끝나고부터 황실보존운동을 했어. 혼자 몸으로 못 하니깐 20년 동안 전국으로 다니면서 강의했고, 이제는 반대하는 사람은 없어. 내가 살아있을 때 해보자고… 대통령한테도 한 시간만 독대를 하자고 신청했어. 나라에 상징적 어른, 정신적 지주가 있어야 된다고. 전통 있는 역사를 살리라고, 관광자원으로 날 사용하시라고 말해야지. 둘째 딸에게도, ‘공부 열심히 해라. 아빠를 실망시키지 말고.’ 우리나라에서 왕실 엑스포를 한 번 해보자고 그랬어. 외국인들이 경복궁, 창덕궁 와서 볼 게 뭐가 있어? 수문장 보초들만 왔다갔다 하잖아. 진짜 가례식, 어가행렬을 해야 해. 전통을 살려서 자부심을 세워야지.” 변인숙 기자 baram4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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