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도설움도날린‘은빛시위’

입력 2008-08-1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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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양궁개인銀박경모“부담때문에흔들렸다”아쉬움
입스(YIPS)를 극복한 값진 은메달이었다. 그리고 ‘양궁의 교과서’는 다음 올림픽을 후배들에게 맡겼다. 박경모(33·인천계양구청)는 고3이던 1993년,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 해 9월, 세계선수권에서 세계기록(119점)을 세웠고, 최고대우로 실업무대를 밟았다. 1994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는 2관왕을 달성하며 박경모의 시대를 예고했다. 하지만 이듬해부터 슬럼프에 빠졌다. 국내대회에서조차 64강을 넘기가 힘들었다. 자신감을 잃으니 ‘양궁의 교본’이라고 불리던 자세도 흐트러졌다.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갑자기 얼어붙는 입스나, 투수들이 원인불명의 제구력난조를 보이는 스티브블래스병과 같았다. 칠흑 같은 4년. 소속팀의 인내도 한계에 다다랐다. 1999년, 방출설움을 겪었다. 24세의 젊은 나이, 활 대신 손에 들린 것은 술병이었다. 재능을 안타깝게 여긴 대한양궁협회 서거원(52·인천계양구청감독) 전무가 박경모를 불렀다. 대우는 4년 전에 비해 초라했다. 전지훈련을 핑계 삼아 제주도로 날아갔다.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고, 넓은 바다를 봤다. 둘은 단 한 번도 양궁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났다. “정말 다시 한 번 잘 쏴보고 싶냐?”, “네. 여기서 끝낼 수는 없습니다.” 활 잡는 법부터 다시 배웠다. 1년이 지나자 몸 구석구석 숨겨져 있던 감각이 되돌아왔다. 2001년, 태극마크를 찾았다. 박경모는 대표팀에서 가장 강한 활(44파운드)을 쏜다. 큰 키(185cm)와 긴 팔 덕분에 실제 파운드(51)는 더 크다. 다른 선수들은 컨트롤하기조차 쉽지 않지만 기계처럼 힘과 타이밍이 일정하다. 15일, 박경모의 화살은 시속 212-214km를 벗어나지 않았다. 어렵게 찾은 감을 잃고 싶지 않았다. 물 한모금도 가려마실 정도로 몸 관리가 철저했다. 회식자리에서도 술잔은 사양. 미혼인 박경모를 위해 소속팀감독의 맞선제의도 있었지만, 양궁 이외의 것은 올림픽 뒤로 미뤘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암 선고를 받은 아버지 간호는 예외였다. 오후 훈련을 마치고 병원에 다녀와서 야간 훈련에 나섰고, 6월 아버지의 임종직전에는 제주도로 가족여행도 다녀왔다. 슬픔을 털고 날아온 베이징, 하지만 112-113으로 빅토르 루반(우크라이나)에게 딱 1점이 모자랐다. 박경모는 “집중력이 조금 흐트러졌다”고 했다. 7월, 연습 도중 2번이나 부러진 활의 문제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남자양궁의 개인전 은메달은 1992바르셀로나올림픽 정재헌 이후 처음이다. 박경모는 “당장 활을 놓지는 않겠지만 지도자생활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며 선수생활을 정리할 뜻을 밝혔다. 이제 1984LA올림픽이후 이어진 남자개인전 노골드의 한을 깨는 일은 박경모를 보고 배운 후배들의 몫이다. 베이징 |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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