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의핏빛투혼,이배영“메달보다큰박수,날일으켜세웠죠”

입력 2008-09-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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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저 바벨을 들어올려야 한다는 생각 뿐. 자신을 이겨 내는 한 인간의 투혼은 민족주의도 뛰어넘었다. 올림픽 기간 내내 반한감정을 숨기지 않던 중국관중들도 이배영(29·경북개발공사)이 등장하자 박수를 보냈다. 그는 넘어지는 순간까지 바벨을 놓지 않았다. 머리를 한 번 쥐어뜯으며 아쉬움의 탄성을 남긴 뒤, 4년 전처럼 또 환하게 웃었다. 포기를 모르는 사나이. 영원한 스마일 맨. 그래서 메달리스트 보다 더 큰 박수를 받았다. ○ 평범함이 가져다 준 열정 인터뷰 도중 TV에서 이배영의 모습이 나왔다. 은메달을 딴 2004년보다 더 바쁜 나날이다. 수첩에는 행사 일정이 빼곡하고, 금융·건설·음료 회사에서 CF 문의도 쇄도한다. 하지만 이배영은 자신이 돌아갈 곳이 어디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오전에도 바벨을 잡아보고 나왔다”고 했다. 이제 훈련이 가능한 정도다. 이배영은 8월31일, 10년 넘게 땀을 흘려온 태릉선수촌으로 향했다. 재능만 이야기하자면 “나는 한 참 모자란 선수.” 그래서 역기를 더 많이 들어올렸다. 순창북중 1학년. 역도부가 생겼다. 체육시간마다 각 반을 돌며 ‘힘 좀 쓴다’는 학생들을 뽑았다. 이배영 반의 차례. 하지만 이배영은 ‘교실을 지키라’는 특명을 받은 주번이었다. 키 130cm, 체중 32kg. 아무도 “교실에 한 명이 남아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게 돼 있다. “못 보던 학생이네….” 창단 두 달이 지난 뒤에야 윤상윤(현순창고) 감독의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중학교 최저체급인 40kg을 맞추기도 쉽지 않았다. 누구보다 왜소했기에 기술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하체를 쓰는 법, 좌우균형 잡는 법을 익혔다. 중학교 3학년 때 소년체전 3관왕에 올랐고, 한국역도 최고의 테크니션이 됐다. 체육과학연구원(KISS) 문영진 박사는 “장미란(25·고양시청)과 사재혁(23·강원도청)도 이배영의 기술을 따라가지 못 한다”고 했다. 이배영은 “역도선수는 괴력을 타고난 돌연변이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60억 명은 모두 똑같은 사람. 모두가 비범하고 싶지만 또한 모두가 평범하다. “나는 누구보다 평범했기에 열정을 품을 수 있었다. 타고난 힘을 가졌다면 노력을 덜 했을 것 같다”고 했다. 만일 누군가 이배영에게 ‘당신은 특별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평범하다는 사실에 좌절하지 않은 것’뿐이다. ○ 열정이 가져다 준 긍정 이배영의 오른쪽 팔꿈치에는 수술자국이 있다. 고 1때 연습 도중 팔꿈치가 탈골됐다. 뼈는 조각났고, 철심까지 박았다. 그래도 “두 달 만에 다시 역기를 잡을 수 있어 좋았다”며 웃었다. 고3 전국체전 때는 왼쪽 팔꿈치 인대가 늘어났다. 인대 늘어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심각했다. 하지만 베이징에서처럼 역기를 놓지 않고 다음 시기에 도전했다. “풍선이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은 풍선 안에 들어 있는 공기 때문이라잖아요.” 어려운 시기 읽은 책의 한 구절. 보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면의 작용이다. 내 팔꿈치가 순간적으로 닳는 것보다 내 마음이 닳는 것이 더 무서웠다. “사람인 이상 무거운 역기를 들다보면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역경을 딛고 일어설 때 더 빛난다. 이배영은 열정을 공기삼아 다시금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풍선이 되고 싶었다. 그 다음부터는 부상도 두렵지 않았다. 결국 긍정의 미소는 이배영을 온 국민의 가슴속에 새겼다. ○ 긍정이 가져다 준 신의 이배영은 주변 사람들 덕분에 웃음을 지킬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배영은 대학과 실업팀 사이의 진로 갈등 때문에 1년간 무적(無籍)선수가 됐다. 운동할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막막한 재수생을 받아 준 것은 처음바벨을 잡게 한 윤상윤 감독이었다. 아테네올림픽 이후 목표의식이 사라져 1년 간 바벨을 놓았을 때는 역도선수출신의 아내 시선희(29)씨가 큰 힘이 됐다. 시선희씨는 20세에 바벨을 잡은 뒤 입문 1년 만에 한국기록을 작성할 정도로 엘리트선수. 정상에 서 있는 이배영의 고민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메달이 확실했던 베이징올림픽. “실패를 털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국민들의 응원 덕”이었다. ‘진정한 승자는 당신’이라는 글을 볼 때면 스마일 맨의 눈시울도 붉어진다. 이배영의 제1신조는 ‘신의(信義).’ “힘이 돼 준 사람들에게 진 빚. 그 빚을 갚을 생각만으로도 행복해 진다”고 했다. 모 카드회사 광고를 허락한 이유도 수익의 일정액을 좋은 일에 쓴다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 2004년, 은메달을 목에 건 그는 뛰어난 역도선수였다. 2008년, 그는 메달 대신 존경받을 만한 한 인간이 됐다. 빚이 많기에 마음이 부자다. 얼굴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환했다. 태릉=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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