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가수기획취재]‘홍콩아가씨’금사향,병마와싸우는외로운삶

입력 2008-11-2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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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통사는 온라인 음원 수익 중 50%를 가져가는 횡포를 멈춰라(젊은제작자연대)’ ‘한국음악저작권협회는 저작권 징수 배분 기준을 명확히 하라(올바른음악저작권문화챙김이)’ 요즘 가수들의 권리 찾기 움직임이 활발하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에 자기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높이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원로가수들. 과거 서민들의 기쁨과 슬픔을 노래에 담아 부르며 큰 사랑을 받은 이들이 마땅한 생계수단이 없어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다. 중견 가수 정훈희는 “현재 원로가수 대부분이 기초생활수급자로 생활하고 있다”며 “나이가 들어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상황에서 생활고는 더욱 가중되고 있다”고 한탄했다. 해방 후의 혼란과 한국 전쟁의 상흔 속에서 노래로 국민들의 시름을 달랬던 원로 가수들(데뷔 35년 이상, 만 70세 이상). 그러나 이들중 대부분은 지금 기초생활수급자로 변변한 병원 치료 한 번 못 받고 있다. 사단법인 대한가수협회 조사 결과 현재 생존한 원로가수는 20여 명. 이 중에서 비교적 생활이 여유있는 가수는 2∼3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더 이상 설 무대가 없어 생계를 잇기도 빠듯하다. # 46년 19살로 데뷔한 무대, 어느새 60여년의 세월 흘러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나는야 꿈을 꾸며 꽃 파는 아가씨∼♬(‘홍콩아가씨’ 중)” 한국 전쟁이 할퀴고 간 폐허에 울려 퍼지던 이 노래. 지독한 가난과 전쟁의 잔해 속에서 국민들의 시름을 달래줬던 ‘홍콩아가씨’의 주인공 금사향(81·본명 최영필). 그녀는 포탄이 떨어지는 공연장에서 노래했고, 트럭 두 대를 연결해 만든 간이무대에서 군인들을 위로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야외무대에서는 감전될까 저고리 고름으로 마이크를 감싸 쥐며 노래를 불렀다. 이제 6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원로가수’란 수식어가 붙은 그녀를 만난 곳은 3평이 채 되지 않은 경기도 한 병원의 병실이었다. 8개월 전부터 오른쪽 무릎이 심하게 부어 지팡이와 다른 사람의 부축 없이는 거동이 힘든 상태다. 그래도 금사향은 기자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81년 동안 탄 차의 타이어가 고장 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라고 말하는 여유를 보였다. 금사향은 1929년 평양의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나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1946년 상공부 섬유국 영문 타이피스트로 근무하던 중 주변 사람의 추천으로 럭키레코드가 주최한 ‘전국 가수 선발 경연대회’에 출전했다. 타고난 목소리 덕분에 조선 13도에서 1등을 했고, 중앙방송국(현 KBS) 전속 가수 1기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그녀 나이 19세. 데뷔곡 ‘첫 사랑’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을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래도 그녀는 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1954년 부산에서 도미도 레코드사를 통해 대표적인 히트곡 ‘홍콩아가씨’를 취입했다. 이 노래가 전국적으로 히트를 하며 ‘국민가수’로 급부상했다. “당시는 공연만 하는 가수와 레코드 취입만 하는 가수가 있었어요. 나는 운이 좋았지. 무대 오르면서 레코드까지 취입했으니까. 레코드는 영원히 기록이 남잖아요. 그때 무대에는 올랐지만 이름 한 자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분들이 많아요.” 금사향은 이후 ‘잘 나가는’ 가수가 됐다. 작은 체구 때문에 한국 여자가수로는 처음으로 하이힐을 신었고, 공작 깃털로 멋을 낸 공단드레스를 입었다. 그녀의 말을 빌려 “남부럽지 않은 화려한 생활”을 영위했다. 금사향이 더욱 사랑 받을 수 있었던 건 어떤 무대든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군위문단으로 최전방에 갔었을 때였을 거야. 공연을 하다가 알게 된 젊은 군인이 있었는데 노래를 정말 잘 불렀어요. 그런데 다음날 무장공비의 습격으로 그만 유명을 달리했어요. 그 상황에서도 우리는 무대에 올랐어요. 다들 말렸지만 전우를 잃은 이들의 마음을 모른 척 할 수 없었죠.” # “평생을 국민을 위해 노래했는데 우리의 현주소는 너무 비참” 역사의 한복판에서 서있던 그녀였지만 현재 금사향은 경기도 일산의 한 가건물에 홀로 거주하고 있다. 좁은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가야 나오는 집은 비가 내리면 비가 샐 정도로 열악하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곳에서 한때 ‘국민가수’로 불렸던 이가 살고 있는 것이다. “집이 너무 엉망이라 차마 공개를 못 하겠다”고 말하는 금사향은 좁은 병실로 기자를 불렀다. 인터뷰 3일 전부터 다리가 급격하게 나빠져 입원했지만 이 역시 일산 한 병원의 지원이 없었으면 치료조차 받을 수 없었다. “진실을 말하면 우울해진다”며 한사코 자신의 처지를 입 밖으로 내지 않던 그녀는 “비참하다”는 말로 고충을 털어놨다. “비참하죠. 나뿐 아니라 많은 원로가수들이 힘겨워하고 있어요. 국민을 위해 평생을 노래했는데 우리의 현주소는 이래요. 나는 괜찮아요. 하지만 힘겨워하는 우리 시대 가수들을 정부 차원에서 도와줬으면 좋겠어.” 인터뷰 시작부터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던 금사향은 자신과 과거 동료 가수들의 현실에 대해 얘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래서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라며 핀잔을 주며 눈물을 급히 훔쳤다. 홍재현 기자 hong92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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