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영은이상우의행복한아침편지]보릿고개시절심부름의추억

입력 2009-02-0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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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마트에서 고구마를 사려다가 가격을 보고 깜짝 놀라 도로 내려놨습니다. 어렸을 때 밭에 심어 놓고 공짜로 캐 먹었는데, 이제는 돈을 주고 사 먹으려니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어린 시절 저희 어머니는 넓은 밭에다 고구마를 심으셨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머니 혼자 3남 5녀 남매들을 거두시며 참 억척스럽게도 살아오셨습니다. 고구마를 수확하면 옥수수 대를 발처럼 엮어 동그랗게 원통모양으로 ‘통가리’를 만드셨습니다. 통가리를 작은 방 윗목에 세워놓고 그 안에 고구마를 저장하셨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봄이 될 때까지 고구마가 썩지도 않고, 겨울 내내 저희들 식량이 되어주었습니다. 그 당시 시골에선 은행이란 걸 몰랐기 때문에 봄에 쌀이나 돈을 빌려주고, 가을에 일년 치 이자와 함께 받는 ‘장리쌀’이 성행했습니다. 어머니도 남들에게 돈으로 ‘장리쌀’을 꾸어주시고 가을에 이자와 함께 쌀이나 돈을 받으시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장리쌀 빌려주러 가는 심부름을 항상 제가 맡아서 했습니다. 제 위로 언니들이 있었지만, 엄마는 ‘큰놈들은 믿을 수가 없다’며,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저에게 그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그 당시 그 돈이 얼마나 됐는지 모르지만, 묵직한 돈뭉치를 하얀 면 보자기에 둘둘 말아 허리춤에 채웠습니다. 그 위에 내복을 입고, 스웨터를 입고 기차역으로 갔습니다. 저희 마을엔 ‘석교역’이라는 간이역이 있었습니다. 하루에 3번 기차가 왔습니다. 제가 가야 하는 곳은 네 정거장 떨어진 ‘미양역’인데 거기에 과수원 하는 친척집이 있었습니다. 그 곳까지 무사히 돈을 전달하고 오는 게 제 임무였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어려서 기차 값을 반값만 내면 되는데, 그 돈도 아끼시려고 저더러 숨어서 몰래 기차를 타라고 하셨습니다. 간이역이 양옆으로 뻥∼ 뚫려있어 마음만 먹으면 남몰래 기차를 탈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숨어서 기차를 타야한다는 게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릅니다. 차장님이 차표검사 하러 오시기 전에 얼른 화장실로 숨어 들어가 네 정거장 지날 때까지 눈치를 봤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다니는 동안 다행히 들킨 적은 없지만 매 번 숨어서 기차를 탈 때마다 심장이 뛰고, 괜히 배가 아프고, 무척 떨렸던 기억이 났습니다. 당시 미양에 있던 저희 친척집은 복숭아 과수원을 했는데, 여름에 심부름 갈 때는 그 귀한 복숭아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아니면 또 못 먹는다는 생각에 복숭아를 한 자리에서 서너 개 씩 먹곤 했습니다. 그렇게 먹으면 어김없이 배가 살살 아프면서 변소를 찾게 됩니다. 집에 올 때는 식구들 몫으로 보자기 한 가득 복숭아를 싸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 때 역시 공짜 기차를 타고 ‘석교역’에 도착하면 올망졸망한 제 동생들은 역 밖에서 흙장난하며 절 기다리고 있다 저를 보자마자 “언니∼” 하며 달려오곤 했습니다. 사실 걔네들이 기다린 건 제가 아니라 바로 복숭아였지만, 그 때 동생들 얼굴 보는 게 제일 반갑고 좋았습니다. 올망졸망한 그 동생들, 그 때는 저보다 한참 어리다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겨우 서너 살 차이입니다. 어려서 질리도록 먹었던 고구마와 보리밥은 세월이 흘러 별미가 됐고, 그 귀한 복숭아도 이젠 돈만 있으면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됐습니다. 어린 꼬마였던 제가 올해 딱 환갑이 됐으니 세상도 더 좋게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기도 동두천 | 양진이 행복한 아침, 왕영은 이상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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