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인메모리]아시아의역사김태현“사업서도뚝심통했죠”

입력 2009-02-0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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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최고의역도스타가구업체사장님변신
수줍음 많은 여자 헤라클레스 장미란(26·고양시청)도 고민이 있을 때면 주저 없이 전화를 하는 선배가 있다. 그는 한 때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게를 들어올린 남성이었으며, 여전히 한국 최고의 인간기중기로 남아있다. 은퇴한 지 5년. 사업가로 제2의 인생을 열어젖힌 김태현(40)을 만났다. “역도나 사회생활이나 끊임없이 혁신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에서 이제 제법 경영인의 풍모가 느껴졌다.김태현은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에 위치한 아파트내장가구 제조·납품업체 ‘자인토퍼스’의 대표이사다. 자인토퍼스는 김포 고촌의 청구아파트 4000세대와 포항 우현동지구 청구아파트 500세대 등에 내장가구를 납품한다. 2500평 규모의 공장에서 직접 신발장·주방가구 등을 제조하기 때문에, 제품을 중계만 하는 타사에 비해 납기일을 맞추는데 용이한 것이 큰 장점이다. 김 대표는 “최근 건설경기가 안 좋아 우리 회사도 슬림화를 시켰다”고 했다. 직원은 25명 정도다. 김우성(42) 영업부장은 “사장님은 대단히 디테일 하신 분”이라고 했다. 제품 하나의 이음새까지 꼼꼼히 따지기 때문에 품질관리는 업계에서도 소문이 났다. 덕분에 2007년 8월 창사이후 고속성장을 할 수 있었다. 김 대표는 “운동이나 사업이나 완벽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며 웃었다. ○지게 짐 지고, 산을 타넘던 어린 시절 아시안게임 최중량급 3연패(1990·1994·1998), 전국체전 16연패. 인상(205kg)·용상(260kg)·합계(460kg) 한국기록. 장미란 이전, 한국역도중량급의 최고스타는 김태현이었다. 김태현은 1997년, 최중량급 세계랭킹 1위에 오르며 아시아역도가 최중량급에서도 세계로 뻗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김태현은 어릴 적부터 장사로 유명했다. 10남매 중 여섯째, 넉넉하지 않은 살림. 초등학교 때 아버지를 여읜 그는 집안일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지게로 땔감을 모아 오는 일은 그의 몫이었다. “아주 멀리서도 짐을 지고 오는 모습을 보면 저인 것을 다 알았어요. 나무를 산더미처럼 쌓아서 왔거든요.” 역도와 지게질은 모두 균형 감각이 중요하다. 돌이켜보면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던 것도 훌륭한 역도선수가 되기 위한 훈련이었다. 득량중학교 1학년. 학교에 역도부가 생겼다. 체육선생님은 학생들을 불러 기구를 들도록 시켰다. 힘자랑을 하고 싶어 나서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이던 김태현은 뒤에서 쭈뼛거릴 뿐이다. 하지만 송곳은 주머니 속에 숨겨도 결국 튀어나오는 법이다. “야, 너 이리로 나와 봐.” 선생님은 김태현의 골격을 살피더니 바로 역도부에 가입시켰다. 학비도 면제되고, 가끔씩 고기회식도 한다는 말에 김태현도 혹했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키는 컸지만 체중은 36kg에 불과했다. 아무도 뒷날 185cm에 140kg의 장사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김태현은 “당시 나는 완전 B급선수였다”고 했다. 중학교 때는 전국대회에 나가본 적도 없었다. 지역예선조차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진학에도 애를 먹었다. 전남체고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120명 정원 가운데 김태현의 자리는 없었다. “그 때가 인생의 첫 번째 시련기였어요. 그전에는 멋모르고 운동을 했는데, 어린 마음에 천대를 받은 게 큰 상처였어요.” 마침 정부차원에서 서울올림픽 후보팀을 육성하던 시절이었다. 1985년, 전남체고의 정원은 24명 늘어났다. 역도부에 배당된 추가인원은 1명. 운 좋게 그 자리를 꿰찼다. “그래 두고 보자, 하바리로 들어가지만 나올 때는 최고가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어려움을 겪으면서 독기가 생기고, 철이 든 거죠.” 친구 한 번 만나지 않고, 하루 10시간씩 운동을 했다. “체중을 늘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에 밤늦게까지 꾸역꾸역 라면을 챙겨 먹었다. 노력 앞에 장사 없었다. 고2때 대표팀 상비군에 발탁됐고, 1989아시아선수권 6관왕, 1989세계주니어선수권 은메달을 차지하며 단번에 한국역도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역도나 사업이나 굴곡이 있어야 강해집니다. 김태현은 전병관(40·상비군감독)과 함께 1992바르셀로나올림픽 당시 강력한 메달후보였다. 한국선수단의 기수까지 맡았지만 결과는 인상에서 실격. “주위의 관심이 썰물처럼 빠지더라고요. 너무 괴로워 기수도 (박)주봉(45·일본배드민턴대표팀감독)이형한테 물려주고 한국으로 도망 왔어요. 그게 제 인생의 두 번째 시련이었습니다.” 아시안게임금메달 포상금이라고 해봐야 500만원뿐이던 시절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까지 엄습했다. ‘에이, 돈이나 벌자. 막노동을 해도 1년에 500만원을 못 벌겠나.’ 1993년 초, 태릉에서 짐을 뺀 뒤 옷 장사를 시작했다. 부도난 유명메이커제품을 파는 사업이었다. 그의 재능을 안타깝게 여긴 이형근(45·남자대표팀 감독) 당시 해태 역도팀 코치는 김태현이 기거하던 여관방을 가끔씩 들렀다. “태현아, 운동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운동 그만뒀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밖에서 합숙한다고 생각해.” 이형근 감독은 여관비까지 대신 내주며 김태현을 다독였고, 마침내 김태현도 마음을 열었다. “돈은 나중에도 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이후로 잡념을 버리고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됐지요. 역도나 사업이나 굴곡이 있어야 강해지는 법입니다.” 3개월 뒤 대표선발전. 김태현은 반년의 공백을 무색케 하며 한국기록으로 당당히 태극마크를 달았다. ○돈을 날리고 깨달은 세상원리 김태현은 애틀랜타와 시드니올림픽에서 4위를 차지했다. 시드니에서는 용상260kg으로 올림픽기록을 세웠지만 인상의 열세를 뒤집지 못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과체중을 유지하면서 생긴 당뇨가 발목을 잡았다. “그 때는 정말 눈물을 흘리면서 살을 뺐습니다. 그래도 메달보다는 건강이 중요하잖아요. 고지가 저긴데, 세계정상이 눈앞이었는데 말이죠.” 2004년 은퇴한 뒤 첫 번째로 손을 댄 것은 토지인허가 시행사업이었다. 소송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땅의 인·허가를 받는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책상에 앉아있으면 ‘내가 운동을 안 하고 이러고 있어도 되나’하는 생각까지 들었죠. 선수촌생활만 15년을 하다보니 운전대를 잡으면 자연스레 태릉 쪽으로 향했어요.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곤 했지요.” 결국 돈만 날리고, 사업을 접었다. 하지만 “실패를 통해 세상원리를 터득한 것이 이후 사회생활에 큰 밑거름이 됐다”고 했다. ○비운의 스타요?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구사업을 시작한 것은 동종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친형의 영향이 컸다. “어려운 시기에 무엇으로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을지를 많이 고민했어요. 운동했던 사람들에 대한 편견도 많았지만, 그래도 성실함만은 인정해주시더라고요.” 최근 건설업계에서는 주문을 받아도 일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제품제작 과정에서 부도가 나는 회사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자인토퍼스가 사업파트너에 대한 ‘신뢰’를 쌓아갈 수 있었던 것은 ‘한 번 맡은 일은 땅 끝까지 책임을 진다’는 김 대표의 경영철학 덕분이다. “이사하다가 본인 부주의로 살짝 긁힌 신발장도 교체를 요구하는 분들이 계세요. 저희는 보면 딱 알거든요. 불량품인지, 입주자 책임인지. 그래도 다 3년간은 무상수리 교환을 해드려요. 눈앞에 한두 푼보다 입소문 잘 나는 게 중요하니까요.” 김 대표는 5일, 대한역도연맹 이사회에서 사업이사 직책을 맡았다. 태릉을 떠날 때 후배들과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밖에서도 물심양면으로 돕겠다고 했지만 바쁜 사업에 쫓기다보면 여의치 않는 경우도 많았다. “상황이 허락하는 한 돕는 것이 진실된 것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성공한 다음에…’라는 말은 다 핑계죠.” 그 진실함 덕분에 역도 선·후배 사이에서도 인망이 높다. 인터뷰 직후 저녁식사 도중에도 선·후배들은 전화통화로 그의 안부를 물었다. 남들은 올림픽메달과 인연을 맺지 못한 김태현을 가리켜 비운의 스타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제가 왜요? 꿈의 기록이라는 용상 260kg을 들었고, 사업을 하면서도 역도 선·후배 사이에서 파묻혀 있는 걸요. 1월 공장오픈식 때도 역도인들이 많이 와서 축하해줬는데 어찌나 큰 힘이 되던지….” 진정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일이 바뀌어도 사람은 남는 법. 그래서 김태현은 인생의 2막에서도 힘찬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김포 |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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