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인메모리]꿈나무에재활의빛‘아름다운중간계투’

입력 2009-02-0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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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클리닉운영전프로야구투수
학창시절 별명은 ‘독고탁’. 왜소한 체격으로 거대한 타자들을 쓰러뜨려나가는 모습은 이상무 화백의 만화 주인공 독고탁과 흡사했다. 프로시절 별명은 ‘차대기’. 날마다 등판을 대기해야하는 중간계투의 고단한 숙명을 함축하고 있다. 한때는 머리를 빡빡 밀고 나타나 ‘명주대사’라는 별칭까지 붙었던 차명주(36). 경남상고와 한양대 시절 줄곧 태극마크를 단 ‘황금의 92학번’ 멤버. 프로 입단 후 주춤했지만 중간계투로 자리를 잡고 마당쇠의 소임을 다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등판하는 그였기에 언제든 야구장에만 가면 볼 수 있는 얼굴인줄 알았지만 이젠 그 모습도 아련한 추억이 되고 있다. 2006년을 끝으로 은퇴한 뒤 재활전문 스포츠클리닉을 열어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나가고 있는 차명주를 만났다. ○마당쇠에서 재활 전문가로 변신 서울 서초동에는 차명주의 부친과 형이 운영하는 ‘영변’이라는 횟집이 있다. 두산 시절 박용오 회장을 비롯해 야구인들도 단골로 찾는 세꼬시 전문점이다. 차명주는 바로 앞 빌딩에 ‘젬 휘트니스(Gem Fitnees)’를 열었다. “선수 때는 명함이 없었는데….” 그는 수줍게 웃으면서 명함을 건넸다. 선수 시절엔 얼굴이 명함. 명함이 있었더라도 숨가쁘게 긴 직함을 다 적을 수 있었을까. ‘좌타자 상대 전문 원포인트 릴리프 좌완투수’ 혹은 ‘좌타자 상대 전문 좌완 스페셜리스트’. 그가 이제 야구를 하다 다치거나 수술한 선수의 재활을 돕는 ‘재활 전문가’로 변신했다. 회원 대부분은 중학교나 고등학교 선수들이다. “요즘엔 중·고생 중에도 수술하는 선수가 많아요. 아니면 재활훈련이 필요한 선수도 많고요. 아프면 겁부터 나니까 무조건 수술하기도 하지만 그게 성장하는 선수들에게 반드시 좋지는 않습니다. 수술을 하더라도 그 이후가 더 중요하고. 프로선수들은 각 팀에 트레이너가 다 있으니까 제가 돌볼 선수는 어린 꿈나무들이죠.” 인터뷰를 하고 있는 사이 배명중에서 야구를 하다 어깨통증이 생긴 어린 선수가 아버지와 함께 찾아와 상담을 했다. 그러나 그는 회원수 50명으로 한정해놓고 더 이상의 회원은 받지 않는단다. “현재 재활전문 트레이너 1명과 스태프 2명이 있는데 너무 많은 회원을 받으면 다 관리하기 힘들어요. 수술한 친구들 자세도 봐줘야하고, 재활과정에서 던지는 공 개수와 거리 등도 프로그램에 따라 항상 체크해야하니까. 어린 친구들이 여기 올 때는 아팠지만 나갈 때는 안 아프게 해줘야죠.” ○선수시절부터 준비한 재활 클리닉 그는 오래 전부터 재활훈련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두산 시절부터 매년 자비를 들여 일본 돗토리로 떠나 재활훈련을 하면서 관심이 더욱 커졌다고 한다. “국내에 트레이너가 차린 재활센터는 있지만 선수 출신이 시작한 적은 없잖아요. 선수생활을 할 때부터 은퇴하면 이걸 하고 싶어 꾸준히 공부하고 준비를 해왔어요.” 2007년 5월 ‘젬 휘트니스’를 열었다. 사회에 나와 처음 하는 일. 두려움과 걱정이 앞섰지만 그는 부딪쳤다. “처음 시작할 때는 중·고등학교 감독님들한테 인사하는 것부터가 걱정이더라고요. 아마추어 지도자 중에는 예전과 달리 모르는 분도 많았거든요. 그런데 저도 야구했고, 감독들도 야구한 분들이라 그런지 다들 설명을 듣고는 안면 없는 감독들도 많이 도와주셨어요. 이젠 그분들이 아픈 선수를 저에게 보내주기도 하고, 필요로 하면 제가 직접 학교에 가서 돌봐주기도 하고 그래요.” ○경남상고 시대 개척한 황금의 92학번 사무실 한쪽에 박찬호의 사인이 담긴 LA 다저스 모자와 메이저리그 100승 기념공이 눈길을 모았다. 한양대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인 박찬호가 겨울 동안 한국에 머물 때 가끔씩 들러 횟집에서 식사도 하고, 이곳에서 쉬거나 훈련을 하다 가기도 했단다. 박찬호와 차명주. 임선동 조성민 손경수 박재홍 곽재성 등과 함께 초고교급 투수로 불리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황금의 92학번’. 이 중 유일한 좌완이었던 차명주는 1991년 곽재성과 함께 대통령배와 청룡기 우승을 이끌며 경남상고를 창단 43년 만에 처음 중앙무대 정상에 올렸다. 청소년대표 시절 친해진 박찬호와는 한양대 92학번 동기가 됐다. 박찬호는 94년 LA 다저스에 계약금 120만 달러에 사인했고, 차명주는 3학년 때인 95년 보스턴이 계약금 60만 달러에 입단제의를 했지만 해외진출을 포기했다. “제 스스로 체격이 작아 힘들 거라 생각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했는데 고3 때도 167cm 정도밖에 안됐으니까. 야수들은 키 작은 선수도 제법 있지만 투수 중에는 저보다 작은 선수는 거의 없잖아요. 부모님도 걱정하셔서 포기했죠.” ○미안해요 롯데, 고마워요 두산 롯데는 1996년 1차지명한 그에게 팀사상 최고계약금 5억원을 안겼지만 명성을 이어가지 못했다. 1996년 김용희 감독은 마무리투수라는 중책을 맡겼지만 실패가 잦자 선발로 돌렸고, 첫해 2승5패8세이브에 그쳤다. 이듬해 7승9패, 98년 승리없이 7패. 98시즌이 끝난 뒤 OB 포수 최기문과 맞트레이드됐다. “대학 졸업하면서 야구 그만두고 대학원이나 미국으로 가서 공부할 생각이었어요. 공부에 욕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프로진출을 원하는 부모님과도 갈등했죠. 결국 제 뜻을 접고 스프링캠프가 열흘도 남지 않은 2월 말에 롯데와 계약하면서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시즌에 들어가다보니 부담이 되더라고요. 성적이 안 나오니 자신감도 떨어지고.” OB(현 두산)로 이적하면서 정체됐던 그의 야구인생도 회전목마를 탔다. 김인식 감독은 중간계투로 그를 요긴하게 활용했고, 그는 99년에만 83경기에 등판하며 시즌 최다등판 신기록을 썼다. 2001년에는 84경기에 나서 자신의 기록을 다시 갈아치웠다. 특히 그해 10승 투수 한명 없이 두산이 준플레이오프부터 거쳐 한국시리즈 정상까지 오른 데는 불펜의 막강한 힘이 크게 작용했다. 2004년 LG 류택현(85경기)에 의해 그의 최다등판 기록은 역대 2위로 밀려났지만 2001년부터 2003년까지 3차례 작성한 홀드왕 기록은 아직 그의 몫이다. “롯데에서 일어서지 못한 채 두산으로 갔는데 김인식 감독님과 최일언 코치님이 많이 키워주셨어요. 더블헤더를 포함해 15경기 연속 던진 적도 있지만 야구가 잘 되니 힘든 것보다 재미가 있더라고요. 자주 던지는 게 적성에도 맞고. 그 때 부산에 가면 ‘이 XX, 롯데 있을 땐 못하더니’라면서 욕하는 팬들이 많았어요. 지금도 부산에 내려가면 아쉬움, 미안함, 죄책감이 들어요. 선수생활 말년에라도 부산에서 보탬을 줬으면 좋았을 텐데….” ○FA 선언한 뒤 돌연 은퇴 선언 2004시즌 중반 임재철과의 트레이드돼 한화 김인식 감독의 품에 다시 안겼다. 한화에서도 2005년과 2006년 각각 77경기와 51경기에 등판해 마당쇠처럼 공을 뿌렸지만 한때 147km를 찍던 직구 구속은 막바지에 130km대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시즌 후 의외로 프리에이전트(FA)를 선언했고, 불러주는 팀이 없자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아버지는 선수생활을 더 했으면 했어요. 그런데 저는 저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싶었어요. 스스로 한계가 왔다는 구실을 만들고 싶었던 거죠. 물론 마흔살까지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도 있었지만 스스로 원하는 야구를 못하느니 보기 좋게 그만두는 게 낫겠다 싶었죠. 불러주는 팀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은퇴했죠. 24년간 야구 유니폼을 입었어요. 저만큼 야구해본 사람 얼마나 많겠어요. 후회는 없어요. 태극마크도 달아봤고, 상도 많이 받아봤고, 우승도 해봤고. 무엇보다 야구하면서 단 한번도 아프지도 않았고.” ○제2의 인생도 연결고리의 삶 잘해봤자 본전, 못하면 죄인이 되는 빛나지 않는 보직 중간계투. 승부의 고비가 오면 어김없이 “차대기!”라는 호출이 떨어져 경기 후반부엔 화장실도 자제하고 알아서 몸을 풀어야했고, 한 타자든 1이닝이든 상대의 흐름을 끊으면 그의 일과는 끝났다. 선발투수는 하루 등판하면 4일을 쉬지만, 그는 4일 등판하면 하루를 쉴까말까한 고된 노동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시절이 행복했다고 돌이켰다. “선발투수 승리를 날리면 제가 미안하다고 밥을 사고, 승리요건을 지켜주면 선발투수가 고맙다고 밥을 사주고.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 속에 사람냄새와 정이 있었어요.” 그의 장래 희망은 무엇일까. “프로입단 때 포기했던 교육대학원에 다시 들어가 공부하고, 일본도 왔다갔다하면서 이 분야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하고 싶어요. 아픈 어린 선수들을 치유해 다시 꿈을 꿀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게 얼마나 좋아요. 어린 선수들이어서 재활도 빠르죠. 아마추어 감독들이 그러잖아요. 어린 선수일수록 실력이 하루하루 느는 게 보여서 보람 있다고. 저도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여기 있어도 그래서 즐겁습니다.” 선발투수와 소방수를 연결하는 중간계투 인생을 살아온 차명주. 제2의 인생에서도 그는 부상선수를 정상선수로 연결하기 위해 중간계투를 자처하고 나섰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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