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 | jtbc
[스포츠동아 장은지 기자]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모자무싸)는 20년째 데뷔 못한 영화감독 황동만(구교환)과 유기 공포에 시달리는 PD 변은아(고윤정)의 쌍방 구원을 그린다.
무가치함은 쓸모와 직결되고, 현대에서 쓸모없는 사물은 곧 폐기 수순을 맞는다. 인간도 마찬가지. 잘나가는 친구들 사이에서 열등감을 감추려 남을 더 대차게 씹고, 패악질을 부리는 황동만을 모두가 유기하고 싶어 하지만 그는 입안의 고무처럼 질겅질겅 씹힐 뿐, 결코 삼켜져 순순히 똥으로 분해될 생각이 없다.
반대로 변은아는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아주 작은 소요에도 부지불식간 버려지길 두려워한다. 그 캄캄하고 빽빽한 공포에 사로잡혀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모두가 앞으로 치고 나갈 때 한자리에 오래도록 괴어 있단 점에서 둘은, 이 ‘무가치함’을 내세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기 충분하다.
‘감정’ 시계를 차고, 인간을 ‘감정’ 덩어리라 부른다.
박해영 작가는 제목부터 “이 드라마는 무가치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겁니다”라고 천명했지만, 무가치함이란 물고기를 낚기 위해서는 감정이란 웅덩이를 빤히 들여다보는 것이 먼저다.
은아는 인간을 ‘감정 덩어리’라 부른다. “나는 인간이 감정 덩어리로 보여요!”라고 쏘아붙이는, 감정에 잠식당하는 인간에 넌더리와 진저리가 쳐진다는 저 말에조차 미련과 멸시, 비웃음과 애틋함 같은 ‘애수’가 덕지덕지 묻어나 있다.
동만과 은아는 감정 시계를 찬다. 긍정에 가까운 감정을 느낄 땐 다이얼에 초록 불이, 반대의 상황에선 빨간 불이 뜬다. 둘은 일상의 대부분을 빨간 불과 보낸다. 불안, 억울, 이따금 직격타를 맞았을 땐 ‘격한 수치’까지. 떠오르는 활자는 매번 다르지만 빨간불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다. 시계가 시시각각 띄워 올리는 감정의 모양은 대체로 사람들의 말로부터 말미암는다. 입으로 내뱉는 말, 그리고 몸의 신호. 남의 작은 기척에도 십수번 울려대는 감정 시계를 보고 있으면 ‘감정’이야 말로 모든 일의 원흉인가 싶다.

사진제공 | jtbc
무가치함·열등감·무력감…못난 감정의 스노우볼
드라마는 무가치함, 열등감, 무력감, 허영, 수치 같이 ‘감정’ 중에서도 가장 추한 것들만 뭉쳐놓고 언덕에서 굴린다. 그들의 것 그리고 내 것이기도 한 못난 감정은 추진력마저 얻고 어느덧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블레즈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방 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는 법을 모른다는 점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드라마는 “인간의 불행은 단 한 가지, 감정에 기인한다”고 바꿔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부화뇌동의 원흉이 되는 감정을 누르면 될까. 감정이 둔해지면 방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뭔 상관일까. 그러나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감정을 부정하면 그 전에 ‘모든 불행’이 없을 것이고 그보다 먼저 ‘불행을 느끼는 인간’이란 명제가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을 거듭하다 보면 문장 자체가 흔적도 없이 지워질 것이다. 결국 감정이 없다는 건 고요와 평온이란 단어조차 없는 세계. 아무 느낌도 아무 이야기도, ‘아무’란 아무 말도 사라진 무저갱의 세계다.
인간의 사고 체계와 철학의 로직이 구체화하던 근대의 사상가는 “생각해서, 존재한다”며 ‘생각’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했지만, 생각의 통로인 사고와 이성이 기본값이 되는 AI 시대에는 인간다움, ‘감정’이 곧 새삼 각별한 존재가 된다.
지분대는 감정의 내벽을 벅벅 긁던 드라마도 이윽고 ‘진짜 속내’를 드러낸다. 드라마에서 황동만이 집필하는 각본 ‘날씨를 만들어드립니다’에 실마리가 있었다. 시놉시스는 대강 이렇다. ‘안정적이지만 통제되어 회색빛뿐인 세상에, 변화무쌍한 날씨를 돌려놓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날씨는 하늘의 표정이자 감정이기도 한데, 날씨가 사라진 세상은 ‘종말’에 가깝도록 치명적이고 삭막한 세계로 그려진다. 작품은 결국 이래저래 적당한 날씨든, 바람이 훨훨 불든, 눈이 펄펄 날리든, 무언가라도 ‘느끼는’ 이상 비단 세계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 동만의 설명을 따라 황홀하게 변모하는 날씨 시퀀스를 보다 보면 말하는 동만도, 듣는 은아와 시청자도 벅차올라 무저갱의 반대편만을 맹렬히 응원하는 일순 감정 덩어리가 되고 만다.

사진제공 | jtbc ‘모자무싸’ 캡처·나무엑터스(구교환)
끔찍한 감정과 화해하는 법, 감정 헤게모니의 역전
‘모자무싸’는 감정을 미워하면서도 ‘과연 감정 없이 세상이 어떤 의미가 가질까’ 하는 존재론적 시름을 있는 힘껏, 매혹적으로 밀어붙인다. 그러면서도 그 감정과 화해하며 사는 나름의 해법을 귀띔한다. 감정에 예속된 존재이길 멈출 수 없다면 다만 ‘감정 헤게모니’(권력, 주도권)를 나에게로 돌려놓는 것. 이것이 드라마가 제시하는 방법론이긴 하다.
감정의 주체는 ‘나’이지만 그것을 휘두르는 권력의 열쇠는 대체로 남에게 쥐어져 있다. 억누르는 힘에서 해방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면이다. 동만과 은아의 감정 시계는 어쩐지 히어로의 ‘슈퍼 파워’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알고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그 감정의 쇠창살에서 풀려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동만과 은아는 ‘알 수 없음’이라 뜨는 정체 모를 표시에 계속 불안과 공포를 이고 지고 살지만 끝내 그것을 ‘구해줘’란 도움의 신호로 번역하고는 끝 모를 위안과 안온함을 느낀다.

사진제공 | jtbc
“모든 스토리는 내가 존재한다는 아우성. 이렇게 아프게, 슬프게, 우울하게, 웃기게 존재해.”
…“살아있는 한 스토리를 써야 한다면 이왕이면 웃기게, 난 그렇게 못 살았지만 넌 웃기게.”
-황진만 대사 中
…“살아있는 한 스토리를 써야 한다면 이왕이면 웃기게, 난 그렇게 못 살았지만 넌 웃기게.”
-황진만 대사 中
가장 사람이 미천해지는 저 바닥의 감정을 끌어와 힘닿는 데까지 웃기게 그리고 싶었던 박해영의 이야기. ‘모자무싸’는 감정과 인간을 화해시키기 위해 그 스스로가 ‘감정 시계’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이 스스로는 좀처럼 들여다보거나 화해하기 힘들었을 지독하고 극심한 감정적 상황을 그려내고는 동만과 은아를 통해 표시한다. ‘그때 그 감정은 ‘열등감’이었어요, 그 감정은 ‘수치심’이었어요’하고 깜빡깜빡 신호를 보낸다.
초반에 몇 번의 거북함을 견딜수록 명쾌하다 못해 유쾌해지는 건, 동만과 은아뿐만 아니라 보는 우리 역시 함께 치유받고 있기 때문일 테다. 그렇게 몇번이고 감정을 직면하다 보면 무가치함도 언제든 전복하고 밀어낼 수 있을 것처럼 옅어진다. 삼키려 할 때마다 서릿발처럼 비죽거리던 요철들이 둥글려진다. 그리고 박해영이 설계한 여로 끝에 도착한 우리가 씻어내는 녹록잖음은 비단 무가치함만은 아니다.
장은지 기자 eun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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