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호이범호. 스포츠동아 DB

이범호
이범호. 스포츠동아 DB


지난달 30일 청주 LG전에서 3개의 홈런을 몰아친 한화의 이범호는 2.3경기 당 1개 꼴의 아치를 그려냈다. 수치상으로만 따지면 시즌 60개에 근접한 홈런이 가능하다. SK의 정근우는 23경기에서 43개의 안타를 때려내 2위 김현수를 10개 밖으로 몰아내며 최다안타 단독 1위를 달리고 있다. 멀티히트 경기만 무려 14번, 이런 페이스라면 200안타 돌파도 이젠 꿈이 아니다. 지독히 투수 위주의 프로야구 판도가 점점 타자 쪽으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투수가 낫냐? 타자가 낫냐?’는 해묵은 논리는 ‘U자 형’인지, ‘W자 형′인지를 따지는 경제지의 경기 지표처럼 결국은 어차피 돌고 돈다고 이야기로 정리가 가능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기나 긴 투수 우대 시대의 야구를 봤다면, 이제는 타자들의 전성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듯하다. 최동원, 선동열 같은 국보급 같은 투수들도 있지만, 한국야구의 초창기, 아니 9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야구의 중심은 타자였다. 이만수, 장종훈, 이종범 같은 선수들이 때려내는 홈런포에 팬들은 열광했고, 던지는 사람이나 투수코치들의 고충과는 상관없이(?) 관중들은 역전의 역전을 반복하는 야구를 사랑했다. 아마 그런 추세가 뒤바뀌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박찬호의 등장이었을 것이다. 케케묵은 IMF 시절의 영웅이니 그런 말은 집어 치우더라도 국민들은 5일마다 한 번씩 나와서 외국선수들을 꺾어주는 그의 활약에 감동했고, 차차 방어율은 어떻게 계산하고, 승리투수의 조건이 무엇이며, 지금이 투수 교체를 할 타이밍인지 아닌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런 조짐은 국내 야구에도 투수 바람을 일으켰다. 무엇보다 투타에 다재다능한 선수들이 프로 입단 이후 둘 중 무엇을 결정하느냐를 보면 그 당시의 트렌드가 뭔지를 확연하게 알 수 있다. 그들은 대게 마운드를 선호했고, 이건 작년에 입단한 최원제까지도 이어졌다. 당시 고교 타자 중 유일하게 쓸 만하다는 평을 받으며 미네소타로의 입단 제의까지 받았던 최원제는 돌연 ‘오승환 선배같은 투수가 되도 싶다’며 마운드를 선택했다. 이런 움직임들로 한국 야구는 2001년 당시 3루수였던 한화의 김태균 이후 6년 동안 타자 신인왕을 배출하지 못하게 된다. 90년대 말, 2000년대 초 이승엽, 심정수 같은 타자들이 나타나 홈런 신기록을 세우는 사건도 있었으나, 딱 그 순간만이라. 그땐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가 홈런 트렌드였다. ‘갑작스런 홈런 광풍이 갑자기 몰아쳤던 결정적인 매개체야 뭐였냐?’를 따지면 좀 골치 아프지만 어찌됐든. 문제는 그 뒤를 이을 타자들이 마땅히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고, 결국 2006년 초대 WBC에서는 김재걸, 김종국 같은 타자들이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다. 물론 이들이 수비력, 리더십을 갖춘 훌륭한 타자들이지만 그 전에 앞서 도무지 뽑을만한 타자가 없어 이들이 선택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으리라. 이런 투수들의 전성시대가 타자로 옮겨지는 과정은 여러 군데에서 발견되고 있다. 지난해의 짜릿한 여름 환희를 안겨준 베이징 올림픽. 물론 류현진, 김광현 같은 젊은 에이스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작품이었지만, 결승전 정대현의 믿기지 않은 병살타 유도를 제외하면 국민들의 뇌리 속엔 결정적인 홈런, 결정적 주루, 결정적 안타 등이 기억되고 있다. 지난 2회 WBC에서도 그런 추억은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프로야구에서는 최형우가 나타나 7년 만에 타자 신인왕을 탄생시켰다. 기대했던 LG 신인 3인방이 부진했던 게 한 요인이긴 했지만, 최형우의 활약은 ‘중고신인’이라는 약간의 마이너스 요인마저 무색케 할 정도로 굉장했다. 어차피 2위 역시 내야수 김선빈이었다. 아직 고작 한 달밖에 지나지 않은 시즌이지만 올해 역시 안치홍과 김상수, 이 두 명의 내야수들이 신인왕 경쟁에서 가장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꾸준히 출장을 보장받고 있는 이들은 2002년 박용택 이후 7년 만에 신인 타자 규정타석 진입까지 노릴 태세다. 국가대표의 3번 타자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김현수는 여전히 21살에 불과하며, 황재균, 최 정, 강민호, 나지완 등 이제는 20대 초반의 훌륭한 타자들이 리그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투수왕국 애틀랜타로 간 강타자 봉중근은 투수가 됐고, 좌완 파이어볼러 추신수는 타자가 됐다. 양준혁은 농담 삼아 자신이 1루에서 외야수로 전향한 덕분에 이승엽이 타자가 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쇼 프로의 인생극장처럼 한 순간의 선택으로 우리는 어떤 강타자나 빼어난 투수를 잃었을 수도, 혹은 얻었을 수도 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신도 공평하지 않아서 대게 잘 던지는 사람이 잘 치고 잘 잡곤 한다. 팬들의 관심사도 이제 다승, 방어율, 탈삼진 1위에서 홈런, 타율, 타점 1위가 누군가로 초점이 옮겨가고 있다. 그래, 대승적으로 생각하면 이미 봉중근, 류현진, 김광현의 좌완 3인방과 우완 에이스 윤석민 카드를 쥐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좋은 타자가 자꾸 생기는 게 훨씬 이득일지도 모를 일이다. 엠엘비파크 유재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