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볼피플]‘권노예’권혁의야구스토리

입력 2009-08-06 0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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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 일러스트|박은경 기자 parkek4114@donga.com

요즘 그의 별명은 ‘권노예’다. ‘국민노예’ 정현욱(31)과 더불어 올 시즌 삼성 마운드를 오롯이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4일까지 52경기에 등판해 무려 66.2이닝을 소화했다. ‘혹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주인공은 바로 삼성 좌완투수 권혁(26)이다.

최근 그를 서울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얼굴을 보자마자 별명 얘기를 꺼냈더니 그는 “(정)현욱이 형이 더 힘든데요”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어 “선수가 벤치를 멀뚱히 지키는 것보다 경기에 나가는 게 더 좋지 않나요?”라며 배시시 웃었다.

○52경기 66.2이닝… “안아프면 비정상이죠”

지독할 정도다. 권혁의 방어율은 2.84. 정현욱(2.73)에 이어 팀내 가장 짠 피칭을 하는 투수이니 “둘이 올라가야 안심이 된다”는 선동열 감독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게다가 권혁은 홀드 부문(20개)에서는 이미 독보적인 1위다.

그러나 전반기 힘을 너무 소진했다. 본인은 “괜찮다”고 말하지만 후유증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후반기 첫 경기인 7월 28일 잠실 LG전과 8월 2일 광주 KIA전에서 내리 패했다. 4일 대구 한화전에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1점차 스코어를 지켜내며 부활했지만 예전에 비해 타자들에게 맞는 일이 늘고 있다.

“솔직히요? 아프죠. 힘들고요. 그렇게 던지는데 안 아프면 비정상이에요. 그래도 고생해서 팀에 보탬이 된다는 게 좋잖아요. 그런 위치가 된다는 게, 인정받는 것 같아서 좋네요.”

권혁은 인터뷰 내내 “좋다”는 말을 반복했다. 2005년 왼쪽 팔꿈치 인대가 끊기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수술 후 재활을 거치며 1년 넘게 그라운드에는 코빼기도 비추지 못했으니 “경기에 나가는 것만으로 감사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팔꿈치 부상·수술…독기품고 ‘나홀로 재활’ 대성공!

권혁이 수술을 받은 2005년은 ‘삼성 투수 수난시대’였다. 한 달 간격으로 임창용 권오준 오승환이 줄줄이 병원으로 실려 나갔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재활트레이너는 하루가 멀다 하고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처지가 됐다. 가장 먼저 수술을 받은 권혁은 “본의 아니게” 찬밥신세가 됐다. 하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트레이너가 짜준 스케줄대로 묵묵히 재활에 매달렸다.

“혼자 해서 더 독하게 했던 것 같아요. 사실 재활이라는 게 남이 도와주는 부분도 있지만 결국 자기가 어떻게 하느냐가 가장 중요하거든요. 절박했기도 했고요.”

권혁의 ‘나홀로 재활’은 대성공이었다. 다시 등판한 2007년, 그는 무서운 투수로 성장해 있었다. 방어율은 4점대에서 2점대로 대폭 낮아졌고, 2008년에는 43경기 출장에 6승 무패, 방어율 1.32를 기록했다.

○무작정 좋아서 시작한 야구…키가 작아 관두기도

지금이야 편하게 말할 수 있지만 당시 권혁의 수술 소식은 본인에게도, 구단에게도 충격이었다. 권혁은 스카우트가 지옥에서라도 데려온다는 좌완 파이어볼러로, 구단의 유망주였기 때문이다. 2004년 9월에는 역대 좌완 최고 구속인 156km를 찍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기록을 보고 나도 놀랐다”며 “지금은 그렇게 안 나온다”고 손사래를 쳤다. 겸손이 지나치다고 생각했지만 뒤이은 권혁의 프로야구 입문기를 들어보니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도 이해가 됐다.

권혁은 방과 후 동네 친구들과 날이 저물 때까지 야구를 할 정도로 야구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무려 1년간 어머니를 졸라 수창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을 정도. 무엇보다 투수라는 포지션을 좋아했다. 성광중에 진학한 후에도 투수만 고집할 정도로 애착이 컸다.

그러나 곧 야구를 할 수 없는 운명과 맞닥뜨렸다. 키가 165cm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았던 것. 체격이 작다보니 친구들에게 밀려 경기에 나가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결국 중학교 2학년 때 야구를 그만뒀다. 때마침 IMF 금융위기로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났고 집안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포기하게 된 것이다. 권혁은 고등학교도 일반학교로 진학했다.

○고교시절 키 쑥쑥… “나는 야구할 운명인가봐”

운명은 그가 평범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고교에 진학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1년에 10cm씩 키가 훌쩍 자랐다. 늦게 시작한 공부에 좀처럼 흥미를 못 붙였던 권혁은 주변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 야구공을 다시 잡았다. 물론 오랜 공백기 때문에 선수로서 기본기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포철공고로 학교를 옮긴 뒤에도 3-4개월 동안 체력훈련에만 매달려야 했고, 그해 가을에서야 공을 만질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 해 그가 기록한 최고 구속은 144km였다. 초등학교 시절을 제외하고 제대로 야구를 한 건 2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끼는 숨길 수 없었다.

○삼성 입단·올림픽 출전… 행운의 사나이

삼성은 권혁의 잠재력을 꿰뚫어봤다. 2001년 전국대회에서 기량 한번 선보인 적 없는 권혁과 가계약을 맺었다. “프로 입단을 꿈꾸지도 못했다”는 그는 2002년 1차 지명으로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 “실력보다는 덩치발로 들어왔다”는 게 솔직한 그의 설명. 하지만 프로 입단 첫 해 얕은 바닥을 드러냈다. 방어율 13.50이라는 엄청난 성적을 기록했다. 그래도 삼성은 가공되지 않은 투박한 원석을 정성스럽게 깎아나가기 시작했다.

원석이 찬란한 빛을 내기 시작한 건 2007년. 권혁은 “어떤 타자도 잡을 자신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힘이 워낙 좋다보니 그의 직구에 타자들은 손도 대지 못 했다. 하지만 그게 투수의 생명을 갉아먹는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2008년부터 어깨가 아파왔고, 자칫 베이징올림픽에서 국가대표 유니폼도 못 입을 뻔했다.

“선수는 실력이 우선이지만 운도 따르지 않으면 힘든 것 같아요. 전 여러 모로 운이 좋았어요.”

○무적 불펜 비법?… 타자와 싸워서 이겨라!

요즘 권혁의 관심사는 한가지. ‘타자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이기느냐’다. 그가 올해 삼성의 최강 불펜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 이유다.

“중간계투는 하루에 1-2번, 많을 때는 3-4번까지 몸을 풀어요. 여기에는 요령이 필요한데요. 불펜에서 너무 힘을 빼버리면 정작 마운드 위에서는 못 던지거든요. 흔히 ‘불펜에서 간다’고 하는데요. 경기흐름을 잘 보고 올라갈 타이밍에 전력피칭한 후 올라가는 게 필요해요.”

“정말 입바른 말이 아니라, 지금 생각하는 건 팀 성적뿐이에요. 고민이요? 고민은 딱히 없는데…. 아! 요즘 (정)현욱이 형이랑 마무리 싸움을 해요. ‘오늘은 네가 해라’, ‘형이 하세요’라고 서로 미루는 거죠. 마무리가 진∼짜 힘든 포지션이더라고요.”

홍재현 기자 hong9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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