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의 문화프롬나드] 지금 사귀고 있는 여친과 헤어지고 싶다면?

입력 2009-12-02 14:5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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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와 헤어지는 몇 가지 방법’ 시즌2.

 

‘여자친구와 헤어지는 몇 가지 방법(여친헤방)’이란 연극을 보기 위해 대학로를 방문.

파마프로덕션의 작품인데, 전화를 걸어 조금은 노골적으로 "볼 만한 게 있을까요?"하고 물어 추천을 받았다.

여친헤방이 공연되는 미라클씨어터는 4층은 매표소, 5층이 극장이다.

매표소에 가니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잠시만요"하고는 티켓에 날짜도장을 찍어 내준다.

"공연은 7시 30분에 시작하고, 7시 20분부터 입장 가능하십니다."

시계를 보니 아직 20분이나 남았다. 테이크아웃 커피를 한 잔 사들고 건물 밖에서 서성이다 '입장 가능시각' 5분전에 극장으로 올라갔다. 설마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입구의 직원이 "잠시 후에 입장 가능하십니다"하면서 대기실을 가리킨다.

대기실이란 곳이 신기하다. 방이 아닌 사방이 트인 발코니다. 극장 발코니에 서서 어둠 속에 잠긴 대학로를 내려다보는 일도 사뭇 즐거웠다. 연인으로 보이는 몇 명의 관객이 줄줄이 발코니로 들어온다.

열이면 열 모두 커플 관객이다. 커플이라고는 해도 설마 진짜로 여자친구와 헤어지는 방법을 알고 싶어 온 것은 아니겠지.

공연장은, 그러니까 진짜 소극장이었다. 등받이가 없는, 큼직한 시멘트 계단 위에 방석만 달아놓은 좌석. 세어보니 대략 80석이 간신히 넘는 모양이다.

의례적인 휴대폰 전원을 꺼달라는 안내도 없다. 경쾌하고 밝은 재즈음악이 잦아들더니 암전이 밤고양이처럼 스르르 찾아온다. 공연시작이다.

'여친헤방'에는 두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가 나온다. 무대는 남자들이 살고 있는 집이다. 소파와 탁자, 책장, 책상이 소품의 전부. 책상 위에는 뒤통수가 길게 빠진 구형 모니터가 올려져 있다.

작가인 우진(조용현)의 집에 친구이자 배우인 대협(차정민)이 얹혀살고 있고, 앞집에 광년(김지은)이란 이름의 괴짜 여자가 이사 오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코미디로 치닫던 극은 중반을 넘어가면서 멜로를 탄다. 자신이 후천성 소아마비에 걸려 두 다리를 못 쓰게 될 것이란 통보를 받은 우진이 3년 동안 사귀어 온 괄괄한 여자친구 민경(이수나)과 헤어지기 위해 갖은 수를 쓰는 것이 기본 얼개이다.

언제부터인가 대학로 트랜드가 되어 버린 '코믹+신파'의 코드를 적절히 버무렸는데, 의외로 질리지 않고 상큼하다.

좁은 공간을 200% 활용한 아이디어도 좋다. 예를 들면 극 초반, 옆집에 이사 온 광년이 우진의 집 문을 쾅쾅 두드린다. 그런데 이 문이 어떤 문인가 하면, 관객이 입장했던 입구다. 극이 시작되면서 출입구가 무대 세트로 '용도변경'되어 버린 것이다.

표를 내밀면서 직원이 "늦으면 입장 못하십니다"했던 말이 농담이 아니었던 것이다.

배우들은 종종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창문을 열자 대학로의 밤하늘(게다가 만월이었다!)이 고스란히 보인다. 대협이 문을 열고 나간 베란다는 무대세트가 아닌 진짜 베란다였다. 맞은편 건물에 사는 사람은 왜 정확히 이 시간만 되면 남자 한 명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는 베란다에 나와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진실을 알게 된 여친 민경이 우진을 향해 악다구니를 치는 장면에서 감정 조절이 수월했다. 암전 타이밍도 적절했다. 다른 사람이 볼 새라 슬쩍 눈가를 찍어 누를 수 있다.

연기도 연기지만 남자 배우들의 외모가 눈에 확 띤다. 소극장 무대에서 보기 드문 미남들이다.

우진은 정준호를 살짝, 대협은 배용준을 많이 닮았다(혹 본인에게는 스트레스일지 모르지만).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확인해 보시길.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1시간 30분이 훌쩍 지나간다.

가볍게 보러 들어갔다가, 묵직한 울림을 얻고 돌아온 여친헤방. 과연 우진은 민경과 헤어질 수 있었을까. 스포일러의 오명을 얻고 싶지 않지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말해드릴 수 있다.

이 연극을 열 번 본다고 해도, 당신은 결코 여자친구와 헤어지는 방법을 알 수 없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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