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은 팩트를 확인하고도 기사를 쓰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엠바고(일정 시점까지 보도 금지)나 오프 더 레코드(제보자가 보도하지 말아달라는 단서를 달 때)는 물론이고 상황이 유동적일 때는 일단 보류다.
특히 변수가 많을 때는 추이를 살피면서 추가 취재가 필요하다. 자칫 오보로 체면을 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월드컵 최종 엔트리(23명)는 축구 기자들에겐 초미의 관심사다. 시간이 갈수록 ‘경합’에서 ‘확실’로 좁혀가야 하지만 이것이 녹록치 않다.
허정무호의 엔트리 또한 기자들의 속을 어지간히 태웠다. 보름 이상 롤러코스트를 타는 듯한 행보였다.
지난 달 대표팀이 파주NFC에서 훈련할 당시 사석에서 나름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예비 엔트리 26명이 발표되면 모두 남아공으로 가는데, 구자철(제주) 김보경(오이타) 이승렬(서울) 등 3명은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해 무조건 동행시킨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정답이 나왔다. 이들 3명이 추가 요원으로 분류됐다면 최종 엔트리는 결정된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직 변수는 얼마든지 남았다. 믿을만한 소스였지만 기사화는 일단 보류.
에콰도르전(5월16일)에서 이동국(전북)의 부상은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그렇지 않아도 안정환과의 대결 구도로 좁혀지면서 밀린 이동국이 부상당했으니 ‘탈락’을 논할만했다. ‘불투명’이 주를 이룬 시기. 기자들의 머리 속이 또 복잡해졌다.
이리저리 짜깁기해도 정답을 도출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이 시점에 이동국이 1차전에 못 뛰더라도 2,3차전에서 뛸 수만 있다면 데려간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는 ‘가긴 가는구나’는 심정을 굳혔다.
유망주들이 빠진다는 예상은 아직까지 유효.
한일전(24일)을 치르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이승렬과 김보경의 활약이 예사롭지 않았다. 허 감독도 빼기 아깝다고 느낄 정도.
다시 이동국의 탈락이 고개를 들었다. 오스트리아 전훈 캠프 상황을 눈으로 보지 못해 허 감독의 멘트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헷갈리기만 할 뿐. 이는 허 감독의 머릿속도 복잡했다는 방증이다.
벨라루스 전(30일)에서 모든 것이 갈렸다. 곽태휘의 부상 탈락은 차치하더라도 이근호와 신형민은 이날 경기 부진으로 고배를 마셨다.
반면 이동국은 기사회생했고, 이승렬과 김보경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던 드라마가 드디어 종료됐다.
고백컨대 이근호의 탈락은 전혀 예상 못했다. 지난해까지 워낙 빼어났고, 대표팀에서는 박주영과 호흡이 가장 잘 맞았기 때문이다. 조금 부진해도 데려갈 줄 알았다. 결국 보름 전 들은 정보는 혼자만의 정보가 된 셈이다.
허 감독은 그동안 부상이나 슬럼프, 체력, 조직력 등의 잣대를 놓고 머리를 싸맸으리라.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냉정한 판단도 가능했다.
누군가는 월드컵 엔트리의 희비를 운명의 장난이라고 했다. 하지만 말을 바꾸고 싶다. 장난이 아닌‘운명이라는 현실’이라고.
choihg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