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전세를 살고 있는 집이 너무 예쁘다. 오래 찾은 끝에 얻은 집이어서 사고 싶다”며 소박한 바람을 밝힌 엄지원. “여전히 신인”의 마음으로 완숙한 여배우의 자리로 향하고 있다.
이젠 잘 할 수 있는 것보다
잘 하고 싶은 코미디 선택!
그때 카드빚 남았냐고요?
마음의 빚만 늘 지고 삽니다∼
“살짝 와인 한 잔 괜찮으세요?”
초저녁 기운이 스산한 10월 중순의 어느 날, 엄지원이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스파클링 와인의 상큼함이 가볍게 혀끝을 톡 쏘는 사이 엄지원은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유선, 예지원, 한혜진과 함께 한 ‘여배우들의 점심식사’에 대해 말했다.
“지금 일을 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하냐. 우리가 더 잘 해서 후배들의 다리 역할을 해보자”는 게 골자였다고 엄지원은 기억했다. “예전엔 나만 잘 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떤 선택, 어떤 길을 (후배들에게)보여주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는 말이 이어졌다. 시장의 구조 탓에 여배우가 자신의 연기를 제대로 보여줄 기회가 한정되어 있는 현실에서 엄지원은 이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고 있는 셈인 듯했다.
그 길 위에서 만난 새 작품이 11월4일 개봉하는 코미디 영화 ‘불량남녀’(감독 신근호·제작 트라이앵글픽쳐스, 비오비시네마)다. 신용불량의 덫에 걸린 형사(임창정)와 채무 상환 독촉 전문가 여자가 펼치는 해프닝을 그린 작품이다.
집요한 독촉에 일가견이 있는 여자가 엄지원의 몫. 때론 우악스럽고 또 때론 채무자의 감성을 자극하며 끝내 빚을 받아내는 임무가 주어졌다.
사뭇 엄중하게 들리는 여배우로서 일종의 ‘사명’과 행복으로 시작된 엄지원의 이야기 속에서 코미디 영화를 선택했다는 건 의외로 다가왔다.
엄지원은 “잘 할 수 있는 것과 잘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이젠 잘 하고 싶은 걸 택한 셈이다”고 운을 뗀다. 이어 “분명한 캐릭터에 대한 갈증이 있었지만 그 이전에 눈에 들어온 걸 먼저 하다보니 시간이 이렇게 흘러버렸다”고 말하며 웃는다.
과거 카드 연체 이력으로 독촉 최고장을 받아본 적이 있다는 엄지원은 “한창 바쁠 때 전화해놓고 오래 통화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스팸 전화도 끊이지 않는다”면서 “하지만 이번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또 한 번 웃었다. “물론 지금 빚은 없다”면서 “다만 살면서 마음의 빚을 지고 살고 있을뿐”이라는 엄지원은 이미 임창정과는 영화 ‘스카우트’로 한 차례 호흡을 맞춘 경험으로 ‘애드리브 경쟁’을 펼치듯 “서로 치고받으며 상황과 대사를 만들어간 재미”도 쏠쏠했다.
엄지원은 그렇게 이야기를 이끌며 오랜만에 맛보는 ‘주역’으로서 만족도 얻었다. “어차피 연기 뉘앙스의 차이가 크지 않더라도 극을 이끄는 힘을 얻게 됐다”는 자신감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코미디 이적’은 성공한 셈이라고 자평하고 있는 듯했다. 계속되는 인터뷰로 다소 피곤한 기운을 스파클링 와인 한 잔에 녹여내는 여유도 거기서 나온 게 아닐까.
엄지원은 그런 여유 속에서 ‘불량남녀’를 선보인 뒤 2주 뒤인 11월18일 개봉작 ‘페스티발’(감독 이해영·제작 영화사 아침)까지 계속되는 코미디로 관객을 만난다. “쌍둥이를 낳은 엄마의 느낌이 그런 게 아닐까”라며 “한 아이에게만 더 많은 애정을 쏟을 수 없는” 행복의 딜레마를 그녀는 지금, 즐기고 있었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