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희 기자의 호기심 천국] 앗 뜬공이 사라졌다…야구장 블랙홀을 아시나요

입력 2011-06-0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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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정수빈은 잠실구장 외야 ‘블랙홀’의 대표적인 피해자 중 한 명이다. 2009년 10월10일 SK와의 플레이오프 3차전에 우익수로 나섰다가 하필이면 연장 10회 승부처에서 머리 위로 뜬 타구가 조명 속으로 들어가는 불운을 겪었다. 제아무리 수비에 일가견이 있는 선수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스포츠동아DB

잠실 우익수쪽 뜬공 자주 조명속으로
정수빈 임재철 이진영 등 실수 잇따라
목동 해질 무렵 햇빛 1루수 속수무책
베테랑 노하우 등 블랙홀 탈출 안간힘
‘별들의 무덤’ 블랙홀은 빛조차 삼켜버려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주변 천체의 움직임 등을 통해 그 존재가 입증될 뿐이다. 야구장에도 ‘야수들의 무덤’ 블랙홀이 있다. 그라운드 밖의 시선으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야수들은 분명 ‘이상한 무엇인가’가 감지된다고 말한다. 달인들의 수비실력도 빨아들이는 프로야구의 블랙홀은 언제, 어디에서 나타날까.


○블랙홀이 바꾼 야구역사, 호세의 연속경기출루기록

2001년 9월10일 사직 현대-롯데전. 용병타자 호세(당시 롯데)는 박종호(당시 현대)의 59연속경기출루기록(2000년)에 근접하고 있었다. 전 날까지 기록은 54연속경기출루. 하지만 3번째 타석까지는 출루에 실패했다. 운명의 8회말. 4번째 타석에 등장한 호세는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를 날렸지만, 우익수 정면이었다. 당시 현대 우익수는 뛰어난 수비능력을 보유한 김인호(LG코치). 하지만 타구는 김 코치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조명속으로 공이 들어간 것. 결국 호세는 55연속경기출루기록을 이어갔고, 뒤이어 박종호의 기록을 경신했다. 김인호 코치는 “그 때 정말 박종호에게 미안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잠실 블랙홀은 우익수 정위치에서 오른쪽 앞쪽에

조명속으로 공이 들어가는 현상은 모든 구장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유독 사직·잠실의 좌·우익수 방향이 잦다. 올시즌에도 4월9일 잠실 KIA-두산전, 5월1일 잠실 넥센-LG전에서 우익수 임재철(두산)과 이진영(LG)이 같은 현상을 겪었다. 2009년 10월10일 잠실 SK-두산전(PO3차전)도 연장10회, 우익수 정수빈(두산)의 머리 위로 뜬 타구가 조명 속으로 들어가며 승부가 갈렸다. 이들은 모두 수비에 일가견이 있는 선수로 꼽힌다. ‘야구에는 항상 인과관계가 있다’고 하는 김성근(SK) 감독조차도 “그것은 순전히 운이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세 장면에는 공통점이 있다. 타구궤적과 우익수가 포착한 낙구지점이 모두 비슷하다는 것이다. 임재철의 설명은 이렇다. “일단 타구는 2루수 위를 넘기는 약간 라이너성. 낙구지점은 우익수 정위치에서 약간 오른쪽, 그리고 약간 앞쪽.” 현역시절 LG 우익수로 활약한 심재학(넥센) 코치는 “오른쪽으로 5∼6발자국, 앞으로 2발자국 정도”라고 이를 구체화했다. 좌측블랙홀은 우측블랙홀의 대칭방향으로, 좌익수 정위치에서 왼쪽 앞이다. 롯데 외야수 손아섭은 “사직도 비슷한 위치에서 공이 조명속으로 들어간다”고 밝혔다.


○목동·대구는 해질 무렵, 1루수에게 블랙홀이 작용

내야수들은 또 다른 어려움을 호소한다. 넥센 1루수 이숭용은 “목동에서는 해질 무렵 3루수의 송구를 받는데 애로사항이 있다. 태양 빛에 공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야간경기의 초반 20분 정도”라고 밝혔다. 목동의 3루가 서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실제로 이종범(KIA)은 2008년 5월10일 목동경기에서 1루수로 출전, 3루수 이현곤의 송구를 아예 피해버린 적도 있다.

대구도 유사한 상황이 발생한다. 삼성 1루수 채태인은 “목동이 3루수의 송구라면, 대구는 유격수의 송구를 잡기가 어렵다. 목동이 3루 쪽으로 해가 넘어간다면, 대구는 좌익수쪽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주로 해질 무렵쯤인 것 같다”고 했다.


○광주는 낮 시간대, 2루수에게 블랙홀 엄습

LG 박경수와 넥센 김민성 등 2루수들은 광주에서 겪은 어려움을 토로한다. “낮경기에서 5-4-3 병살플레이 때, 3루 관중석스탠드 배경 속으로 공이 들어갈 때가 있다. 흰색 옷을 입은 관중이나 흰색 막대풍선 등이 공과 겹치기도 한다.” KIA 안치홍은 “홈구장인 선수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라면서 “광주가 잠실·문학과는 달리 관중석스탠드가 낮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이 밖에도 “목동 백스톱 LED광고판에서 흰색글씨가 나올 때”, “타자가 흰색 배트로 칠 때” 공이 순간 사라진다고 말하는 선수들도 있다. LG 이대형은 “중견수는 조명속에 공이 들어가는 경우는 잘 없지만, 하늘의 구름이나 해질 무렵 태양빛의 방해는 받기도 한다”고 밝혔다. 메이저리그 전문가 송재우 해설위원은 “미국에서는 천정이 흰색인 돔구장에서 외야수가 순간적으로 공을 시야에서 놓치는 경우가 있다. 추신수(클리블랜드) 역시 그래서 돔구장경기를 선호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태양광선에 들어간 공은 송구한 야수의 실책

조명에 들어간 타구는 일반적으로 안타로 기록된다. 그렇다면 송구가 햇빛 속으로 들어갈 경우에는 기록상으로는 어떻게 될까. 야구규칙 10.13에서는 ‘야간조명등 또는 태양광선에 눈이 부셔 포구에 방해를 받았을 때는 송구한 야수에게 실책을 기록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송구한 야수가 다소 억울할 수 있지만, 출루나 진루에 대한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포구자가 송구를 피한 것과 같이, 누가 봐도 ‘명백히’ 태양광선 안에 들어간 경우다. KBO 기록위원회 이종훈 팀장은 “야수가 공을 따라가서 글러브에 공이 맞았다면, 햇빛이나 조명에 방해를 받았더라도 포구자의 실책으로 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채태인이 “지난시즌 실책 3개 중 2개가 태양빛 때문에 나왔다”고 하는 이유다.


○블랙홀 탈출방법은?

우주공간의 블랙홀은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하지만, 그라운드 안의 블랙홀은 탈출방법이 있다. 협력플레이 등을 통해서다. 이숭용은 “목동에서 3루쪽으로 해가 넘어가면, 미리 3루수에게 원 바운드로 송구하라고 사인을 준다”고 했다. 채태인 역시 같은 방법을 쓴다. 임재철은 “중견수에게 미리 ‘햇빛 때문에 공이 안보이면, 글러브 낀 팔을 내리라’고 말해 둔다. 우중간타구에서 중견수가 우선이라도 이 때는 내가 잡는다”고 노하우를 소개했다. 100%의 보장은 없지만, 조명에 들어간 공의 경우 살짝 자세를 낮추는 것도 방법이다. 베테랑 외야수 송지만(넥센)은 “몸의 방향을 라이트와 정면으로 두지 않고, 라이트에 살짝 빗겨 서 있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setupman@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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