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인 타임’과 월가 시위

입력 2011-11-08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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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욕하며 돈벌이 할리우드

20세기폭스코리아 제공

최근 내가 본 가장 놀라운 영화는 ‘인 타임’(지난달 27일 개봉)이다. 이 영화는 보기 전 한 번, 보고 난 후 한 번 놀라게 만들었는데, 보기 전 놀란 것은 ‘시간이 화폐를 대체하게 된 암울한 미래사회를 그린다’는 이야기의 창의성 때문이고, 보고 나서 놀란 것은 이런 뛰어난 콘셉트로 출발했음에도 믿을 수 없을 만큼 헐렁헐렁하고 유치하고 지루하고 한심한 이야기 전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사람은 25세가 되면 성장을 멈추고, 이후에는 개인이 가진 시간의 양에 따라 영겁의 세월을 살 수도 있고 당장 1분 뒤에 죽을 수도 있다. 부모로부터 엄청난 시간을 물려받은 운 좋은 소수는 ‘뉴 그리니치’라는 부촌에서 느릿느릿 걸으며 파티를 만끽하는 반면에 부모 잘못 만난 다수는 ‘데이턴’이란 빈촌에서 1분 1초를 아끼려는 마음에 냅다 뛰어다니며 일용직 노동으로 당장 내일을 살기 위한 24시간을 버느라 여념이 없다.

영화에는 ‘와이즈 시간금융’이라는 재벌기업이 등장하는데, ‘시간’을 대부(貸付)해주는 이 기업에서 가난한 서민들은 시간을 꾼 뒤 엄청난 이자를 얹어 꾼 시간을 되갚아야 하는 처지다. ‘시간으로 시간을 버는’ 시간금융사의 모습은 ‘돈으로 돈을 버는’ 현대 금융사들의 현실을 꼬집으면서 부익부빈익빈이라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은유한다.

결국 버스요금인 ‘2시간’이 없어 숨을 거둔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분연히 일어난 주인공 윌 샐러스(저스틴 팀벌레이크)가 와이즈 시간금융사 회장의 딸인 실비아(어맨다 사이프리드)와 함께 시간이 지배하는 사회시스템의 비밀을 파헤친다는 얘기다.

여기까지만 들어보면 영화는 꽤 사색적이면서 흥미진진하리라는 상상을 하게 되지만, 실제론 전혀 그렇지 못하다.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인 샐러스가 이 모순적 시스템에 ‘똥침’을 날리는 방식이 너무도 대책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해법은 충격적이리만큼 단순 무식하다. 시간을 독점한 재벌금융사를 급습해 금고 속에서 수천만 년의 시간을 강탈한 뒤 빈민촌으로 가 사람들을 줄 세우고 나눠주며 해피엔딩을 맺는 것이다!

아, 어쩌면 이리도 불학무식한 결말이 있단 말인가. 부자에게 강탈한 시간자원을 “줄을 서시오!” 하듯 나눠주면, 시간을 나눠줄 대상과 나눠주지 않아도 될 대상은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이렇게 시간을 나눠주면 서민의 고통이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세상 모든 이가 똑같은 시간을 갖게 된다면 굳이 더 많은 시간을 벌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이 ‘많이 가진 자의 것 몽땅 빼앗아 덜 가진 자들에게 쫙 나눠주면 끝’이라는 그야말로 할리우드적인 결말로 맺어버리는 것이다.

이 영화는 최근 일었던 ‘반월가 시위’와 묘하게 겹친다. 동시에 할리우드의 비상한 돈벌이 감각에 대해서도 무릎을 치게 된다. ‘서민들이여, 이 영화 보고 부자를 향해 분노하라’고 관객을 선동해 돈을 벌려는 의도가 분명한 이 영화를 투자 배급한 곳은 세계 영화시장을 좌지우지할 만큼 거대한 자본력을 지닌 미국의 20세기폭스사이다. 게다가 민중을 대표해 거대기업을 전복시키는 주인공 역할을 맡은 인물은 연간 1000억 원에 가까운 돈을 벌어들이는 가수 출신 부자 배우 저스틴 팀벌레이크다. 자본주의를 향한 뜨거운 분노까지도 당의를 입혀 상품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아이러니요 힘이 아닐까.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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