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율화의 더 팬] 에이스간 맞장…연습생 홈런왕 드라마 같던 8090 야구 그립네

입력 2011-12-2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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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야구는 라디오 중계가 대부분이었다. 교복 소매에 이어폰을 숨겨놓고 중계방송을 들으며 “우익수 뒤로, 뒤로∼”하는 캐스터의 목소리에 떨리는 두 손을 꼭 모으고 기도하곤 했다.

라디오 중계도 없는 날이면 ‘700’으로 시작하는 ARS 서비스에 의존했다. 30초에 100원이나 하는 비싼 요금과 놀랍도록 또박또박 천천히 발음하는 멘트가 매우 당황스러웠지만, 매달 전화요금 고지서가 나오는 날 부모님에게 등짝을 맞을지라도 성급한 팬심은 습관처럼 3분에 한번씩 700을 누르곤 했다.

TV중계가 흔치 않았기 때문일까. 내 기억속의 야구장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특히 아저씨 팬이 무척 많았는데 한손에는 소주병, 한손에는 닭다리를 들고 앉아 변두리 해설가를 자처하시는 그 분들의 입담은 어지간한 해설자보다 재미있었다. 소싯적 최동원도 업어키우고 선동열의 콧물을 닦아줬다는 그 분들. 도루하려는 상대팀 주자에게 “수근아! 내가 니 애비여!! 어디를 가는겨!”하고 큰 소리로 외쳐 웃음을 터뜨리게 하던 그 분들은 지금도 여전히 야구장 어딘가에 계실까.

경기에 이긴 다음날은 온갖 스포츠 신문을 다 사 모으곤 했다. 삼진을 잡고 두 주먹을 불끈 쥐는 에이스의 모습과 홈런을 치고 그라운드를 도는 4번 타자의 사진을 보며 흐뭇해하고, 상대팀 감독의 패배 인터뷰를 보며 낄낄대느라 하루가 어찌 가는 줄도 모르게 분주했다. 진 다음날은 애써 신문 가판대를 피해가야 하는데, 지하철에서 누군가 그 신문을 읽고 있기라도 하면 쓰린 속을 달래며 눈길을 돌리곤 했다.

무엇보다 그 시절의 야구에는 드라마가 많았다. 연습생 출신으로 홈런왕이 되는 선수도 있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경기는 내가 책임지겠다며 200개도 넘는 공을 뿌려대는 에이스와, 그 에이스 둘을 맞대결 시키는 감독들의 뚝심도 있었다. 몇 번의 수술을 거쳐 기어코 재활에 성공한 노장의 눈물은 팬들에게 감동이었으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거쳐 성공한 선수의 스토리는 힘이자 용기였다.

세월이 지나 그 옛날의 영웅들은 야구를 떠났고 혹간 세상을 떠난 선수도 있다. 몇몇은 덕아웃 한 쪽에 비껴서 있고 그라운드에는 지금도 많은 선수들이 온 힘을 다해 상대를 노려보며 휘두르고 던지고 있다. 그래도 난 가끔씩 그 시절의 야구를 떠올리며 어딘지 촌스럽고 우직한 옛날 야구가 좋았다고 추억하곤 한다. 어쩌면 그것은 이제는 다시 올 수 없는 그 시절에 대한 향수인지도 모르겠다.

여성 열혈 야구팬·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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