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치, 그들을 말한다] 심재학 넥센 코치 “하하! 감독 빼곤 다 해봤지”

입력 2012-02-0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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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학 코치. 사진제공=넥센

아마 최고타자…투수…트레이드…챔프반지…골든글러브…
감독 빼곤 다 해봤지

투타 만능선수…고교시절 국가대표
LG 입단후 폼 바꿨다 좌절…투수 전향
현대 등 14시즌 4개팀 유니폼 입어
“풍운아요? 그게 다 지도자에겐 재산”
제 아무리 위대한 주자라도 공보다 빠를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말의 진위여부는 공을 손에 쥔 야수의 어깨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흐름의 경기라는 야구에서, 상대의 득점을 무산시키는 외야수의 홈송구는 종종 반전의 실마리가 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심재학(40·넥센 외야수비코치)은 이런 반전 드라마의 대표적인 연출자였다.

아마추어 최고타자에서 투수로의 변신과 좌절. 그리고 골든글러브 외야수로 부활하기까지…. 빨랫줄 송구와는 달리, 굴곡이 많았던 그의 야구인생을 살펴봤다.

○아마추어 최고타자의 혹독한 신고식

심재학은 충암고 재학시절부터 투타에서 뛰어난 재능을 뽐냈다. 대학 입학 전에 국가대표로 선발될 정도였다. 고려대에서 중심타자로 활약한 뒤 1995년 LG에 입단했을 때, 서울팬들은 꿈에 부풀었다. ‘좌타거포’에 대한 갈증을 풀어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 “부담감도 있었지만, 저 역시 욕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아마추어 때의 폼을 완전히 바꿨지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줬던 것 같아요. 제가 코치를 하면서도 신인들의 폼은 웬만해서 손대지 않았어요. ‘자신의 깨달음이 있을 때, 변화를 주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았으니까요.” 데뷔시즌 106경기에서 타율 0.230, 홈런 4개. 신고식은 혹독했다.


○시련 속에서 피어난 절박함

아마추어 최고타자의 자존심에는 상처가 났다. “그 전까지는 순탄하게만 야구를 해 왔어요. 그 때 처음으로 절박함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경기가 있는 날에도 매일 오전, 경기도 구리의 2군 훈련장으로 향했다. 김용달 타격코치와 2∼3박스의 공을 친 다음에야 잠실로 향했다. 경기가 끝나면 또다시 배트를 들었다. “하루에 1000개 가까운 공을 치려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어떤 날은 배트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요.” 석 달이 지나자, 결과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6년에는 118경기에서 타율 0.285, 홈런 18개 72타점을 기록하며 이름값을 했다. 1997년에도 117경기 타율 0.285, 15홈런 84타점으로 안착하며, LG의 중심타자로 자리 잡았다.


○통증을 참고 섰던 마운드

하지만 팀에서 그에게 기대하는 바는 더 컸다. 마침 LG에는 선발자원이 부족했고, 코칭스태프에서는 외야에서 시속 146∼147km를 던지던 심재학을 투수로 전향시키자는 의견이 나왔다. “투수가 쓰는 근육은 외야수가 송구할 때 쓰는 것과는 또 달라요. 팔꿈치에 통증이 오더니 나중에는 팔을 들기조차 힘들어지더라고요. 허리도 그 때부터 아프기 시작해서 선수생활 끝날 때까지 고질병이 됐지요. 그래도 더 물러설 수 없었기에 이를 악물었습니다.” 투수로서 거둔 1999년 성적은 15경기 3승3패. 몸 상태는 점점 악화돼, 더 이상 진통제와 소염제로도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결국 그는 다시 방망이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현대에서 또 두산으로, 트레이드의 연속

투수보강이 절실했던 LG는 결국 1999시즌 뒤, 심재학을 현대 최원호와 맞바꿨다. “그때만 해도 ‘트레이드 되면 야구를 그만둬야 하나’ 생각하던 시절이었어요. 당시에는 상처를 많이 받았지요. 마침 현대가 운동을 열심히 하는 분위기라서, 저도 독기를 품었습니다.” 트레이드는 결국 야구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데뷔 첫 20홈런 이상(21개)을 기록했고, 현대의 우승 주역으로도 거듭났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뿐. 2001시즌을 앞두고 두산 심정수와의 트레이드로, 또다시 유니폼을 갈아입어야 했다. 단 1년을 뛴 팀이었지만, 동료들은 눈물로 그를 배웅했다. 두산은 공교롭게도 2000년 한국시리즈의 맞상대. 그 때까지만 해도 두산에서 생애 최고 시즌을 맞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2001년 타격 2위와 골든글러브의 영광

심 코치는 “두산에서 김인식(현 KBO규칙위원장) 감독님을 만난 게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김 감독은 심정수라는 거포와의 트레이드가 그에게 얼마나 큰 부담인지를 알고 있었다. “감독님께서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보라’고 하셨어요.” 결국 117경기에서 타율 0.344(2위), 24홈런 88타점으로 외야수부문 골든글러브의 영광을 안았고, 2년 연속으로 챔피언반지도 손에 넣었다. 심정수를 잃은 상실감 때문에 그에게 비난 일색이던 팬들도 마음을 돌렸다. ‘우동수(우즈∼김동주∼심정수) 트리오’ 대신 ‘우동학(우즈∼김동주∼심재학) 트리오’라는 말까지 나왔다. 김인식 감독은 그를 “컨택트 능력과 장타력을 두루 겸비했고, 왼손타자인데도 왼손투수의 공을 잘 쳤다. 선구안도 뛰어났다”고 기억했다.


○그라운드의 풍운아? 지도자로서는 장점!

2004년부터 KIA 유니폼을 입고 5시즌을 더 뛴 그는 2008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14시즌 동안 3번이나 팀을 옮긴 그를 팬들은 ‘풍운아’라고 불렀다. “투수도 해보고, 타격폼도 바꿔보고, 4개 팀에서 뛰어보고…. 선수시절에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도자 생활을 하는 데는 이 모든 것이 장점이에요.” 심 코치는 “선수 스스로 부족한 점을 느끼게 하는 지도자, 변화해야 하는 이유를 데이터를 통해 설명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며 웃었다.

▲생년월일=1972년 10월18일
▲키·몸무게=183cm·92kg
▲출신교=영중초∼충암중∼충암고∼고려대
▲좌투좌타
▲프로경력=1995년 LG∼2000년 현대∼2001년 두산∼2004년 KIA∼2009년 히어로즈 코치
▲수상경력=1990년 제44회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 MVP, 2001년 외야수부문 골든글러브
▲통산 성적=1247경기 타율 0.269, 149홈런 622타점 617볼넷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setupman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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