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탐하다가 육체에 빠져버린 은교

입력 2012-04-24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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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은교’에서 처음 등장한 고교생 은교(김고은). 이때부터 카메라는 은교의 몸에 포커스를 맞춘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35세 배우 박해일의 백발노인 변신, 신인 여배우 김고은에 대해 꽁꽁 숨긴 신비주의 홍보전략, 박범신 작가의 동명 소설인 원작….

26일 관객과 만나는 ‘은교’는 개봉을 앞두고 여러모로 화제가 됐다. 노시인 이적요(박해일)와 그의 재능을 탐하는 제자 서지우(김무열),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긴장감을 일으키는 고교생 은교(김고은)의 삼각관계를 다룬 이 영화는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 궁금증과 기대가 높았다. 하지만 지난주 시사회에서 공개된 영화는 관객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반응이다. ‘은교’가 갖지 못한 4가지를 짚어봤다.


○ 흡인력 있는 연기

영화에서 몰입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을 배우들의 미숙한 연기. 주연 박해일은 노시인을 연기하기 위해 8시간 동안 특수 분장을 하며 공을 들였다. 하지만 그가 노인의 목소리를 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어색한 음성 때문에 관객은 ‘시인 이적요’ 대신 힘겹게 연기하는 ‘배우 박해일’만을 만나게 된다. 정지우 감독은 “서른의 배우가 일흔의 노인 역할을 하면서 더 흥미롭고 여러 가지 함의를 가진 캐릭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이런 기대는 빗나갔다. 이적요 역에 차라리 노배우를 캐스팅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김무열도 영화 ‘모차르트’의 살리에리 같은 서지우의 ‘재능 없는 자의 슬픔’을 표현하는 데 역부족이었다. ‘그리스’ ‘아가씨와 건달들’ 등 뮤지컬에서 주목받았던 연기에 비해 스크린에서의 행보는 아직 실망스럽다.


○ 진지한 시선

영화는 1955년 러시아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와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여러 영화들의 변주라는 평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단절할 수 없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담은 고전에 비해 영화의 시선은 더 ‘낮은 곳’을 바라본다. 카메라는 고교생 은교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등나무 의자에서 잠자는 모습)부터 여배우의 몸에 집중한다. 관음증적인 시선은 은교가 비에 젖은 교복 차림으로 이적요를 찾아오고, 티셔츠만 입고 눈밭을 뛰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서지우와 은교의 정사장면에서 여배우의 체모를 짧지않은 시간 동안 노출한 것은 어떤 의도인지, 제작진의 설명을 듣고 싶은 부분이다.


○ 매력적인 캐릭터

정 감독은 전작 ‘해피엔드’(1999년)처럼 이번 작품을 세 인물을 축으로 한 치정극 구도로 꾸몄다. 이적요, 서지우, 은교의 삼각구도는 ‘해피엔드’의 남편(최민식)과 아내(전도연), 그리고 아내의 애인(주진모) 구도와 같다. 하지만 영화 속 캐릭터는 그때보다 훨씬 밋밋하다. 불륜남을 만나기 위해 태연하게 아이 젖병에 수면제를 타던 전도연, 아내의 살인을 치밀하게 계획하고도 “아내의 시신을 보고 싶다”고 울부짖던 최민식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가 없다.


○ 증발해 버린 주제 의식

‘당신들의 젊음이 잘한 일에 대한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과오에 대한 징벌이 아니다.’ 박해일의 이 대사는 아마도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는 말일 것이다. 늙음이라는 육체적 한계 때문에 정서적으로는 완벽하게 교감하는 은교를 사랑할 수 없는 이적요의 슬픔. 감독이 표현하고 싶었던 이 영화의 정서인 것 같다.

하지만 늙음에 대한 자기 연민과 고뇌는 박해일의 대사 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젊은 육체를 탐하는 남성의 욕망만이 두드러져 보인다. ‘모던보이’(2008년) 이후 감독의 연출 공백이 너무 길었던 것일까.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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