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Essay] “비틀즈보다 H.O.T”…英 소녀의 K-POP 사랑

입력 2012-07-2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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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소녀 사하라가 런던 히스로공항에서 한글 피켓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런던|전영희 기자

26일(현지시간) 런던 히스로공항에서 장미란(29·고양시청)의 입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옆에서 한 영국인 소녀가 말을 겁니다. 그것도 타국 땅에서 가장 반가운 우리말입니다. 16세 소녀의 이름은 듣기만 해도 건조한 사하라. 하지만 함께 나눈 대화는 전혀 메마르지 않았습니다.

사하라는 K-POP을 통해 한국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빅뱅, 소녀시대, 인피니트 등 아이돌 그룹의 이름을 줄줄 잘도 얘기하더군요. 간간히 제가 잘 모르는 그룹도 튀어나와 당황하기도 했죠. 사하라의 핸드폰에는 K-POP뿐 아니라 ‘무한도전’ 등 한국의 예능프로그램 동영상도 저장돼 있었습니다. “리쌍의 길 오빠는 무도에, 개리 오빠는 런닝맨에 나와요”라는 얘기에 입이 절로 벌어지더군요. 장난기가 발동해 “비틀즈처럼 영국에도 훌륭한 뮤지션이 많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사하라는 아이돌의 원조인 “HOT가 더 좋다”고 말합니다. 함께 ‘캔디’를 흥얼거리는데, 왠지 모를 동질감에 흐뭇해졌습니다.

런던올림픽 양궁경기장은 원래 크리켓이 열리는 곳입니다. 행인에게 위치를 물어보면, “크리켓 잘 구경하라”고 얘기합니다. 그 곳에서 양궁이 열리는 지도 모르는가봅니다. 영국의 어떤 신문의 여론조사를 보니, 올림픽에 관심이 없다는 응답자가 50%가 넘습니다. 자국대표팀에 대한 관심도 사실 크지 않습니다. 하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메달 하나 못 딴다고, 대영제국에 대한 자부심이 퇴색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일부 아시아국가에서 영국이 종주국인 크리켓과 배드민턴을 즐기는 것은 제국주의의 산물입니다. 예를 들어 인도도 영국의 식민지 기간을 거치며 크리켓이 최고 인기 스포츠로 자리를 잡았죠. 공교롭게도 사하라의 부모님은 인도계라고 하네요. 소녀의 부모세대는 제국에서 건너온 크리켓에 열광했겠지만, 사하라는 다릅니다. 이제 사하라의 여가는 K-POP이 점유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한국도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아닐까 싶네요. 사하라와 함께 캔디를 흥얼거리던 시각, K-POP의 본국은 캄캄한 밤이었거든요.

체조 해설을 맡은 여홍철 씨가 입국장에서 나오자, 사하라가 달려가네요. “와, 홍철 오빠다”라고 외치면서요. 아, ‘불멸의 국가대표’까지 아는 것 같네요. 이 정도면,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100년 전 제국주의의 본산이었던 나라에서, 그들에게 스며든 한국문화를 봅니다.

런던|전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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