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의 마음을 움켜쥔 ‘붉은 여신’의 차이콥스키

입력 2012-10-24 17: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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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빈체로·김윤배

“너무나도 인간적이어서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사람이 적지 않은 차이콥스키지만 바이올린 협주곡만큼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좋아한다.

요즘은 어지간한 연주가들이 척척 연주해내는 작품이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음반이 나와 있지만 차이콥스키가 활동하던 당시만도 “기교적으로 도저히 연주가 불가능하다”라는 볼멘소리를 들어야 했던 곡이다. 그것도 당대 러시아 바이올린의 거장인 레오폴드 아우어가 한 말이다.

20세기 현역 명지휘자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페도세예프가 이끄는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의 연주회가 23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1932년생이니 올해로 페도세예프의 나이는 만 80세. 1974년 이 오케스트라(당시에는 차이콥스키 교향악단이라는 이름이었다)의 음악감독 겸 수석지휘자로 취임해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무려 38년이다!

워낙 고령이어서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그의 지휘를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는 오기 힘들 것이다.

1부는 예의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협주곡. 협연자는 2010년 인디애나폴리스 국제바이올린 콩쿠르 우승 이후 세계 무대에서 ‘라이징 스타’로 각광받고 있는 클라라 주미 강이 활을 쥐고 올라왔다.

차이콥스키 협주곡에서 페도세예프는 느리고 유연하게 스타트를 끊었다.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나긋하면서도 섬세하게 뭉친 뒤 실타래가 풀리듯 객석으로 한 올씩 흘러나간다.

이윽고 클라라 주미 강의 대시. 강력하고 도발적이다. 입고 나온 드레스의 붉은 색이 무색할 정도였다. 눈마저 황홀하게 만드는 화려한 보잉과 핑거링, 빠른 패시지에서 가닥가닥 활줄이 끊어져 나가는 모습이 그토록 아름다울 줄이야.

바이올리니스트는 자신만의 비브라토를 가지고 있다. 1막 카덴차에서 클라라 주미 강이 들려준 비브라토는 확실히 관객의 마음을 움켜쥐는 힘이 있었다. 인터뷰 때의 소녀는 사라지고, 무대 위에는 붉은 드레스의 여신이 마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고 관객의 박수가 쏟아질 때 오케스트라 단원들 역시 활로 손바닥을 두드리며 찬사를 보냈다.

2부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0번. ‘혁명’과 ‘레닌그라드’라는 부제가 붙은 5·7번보다는 덜 알려진 곡이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작품이라고 한다.
스탈린과 정권에 대한 추앙이라는 틀을 벗어나 쇼스타코비치의 개인적인 사색과 내면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는 음악적 전환의 계기가 된 작품이다.

페도세예프는 전형적인 러시아 지휘자의 스타일과는 확실히 다른 면을 보여 주었다. 커다란 파도가 일렁이는 듯한 감정의 움직임을 절제하는 대신 단단하게 농축된 소리를 만들어냈다. 마치 소리를 모으고 모아 상자 속에 넣은 뒤 흔들면 이런 소리가 날까 싶었다.

연주회가 끝나고 사람들에 밀리다시피 콘서트홀을 빠져나오니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분수쇼가 벌어지고 있는 광장에는 러시아의 민요가 흘렀다. 서울 산기슭에서 만난 러시아의 밤.
차이콥스키도 쇼스타코비치도, 틀림없이 만족하고 있지 않았을까.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ran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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