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건영통신원의 네버엔딩스토리] 130km 느림보 직구로 14년 연속 ML 10승 도전장

입력 2014-04-23 0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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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L판 유희관 마크 벌리

개인통산 2910.2이닝…현역 최고 ‘고무팔’
2005년 화이트삭스 88년만의 우승 선봉장
퍼펙트와 노히터 모두 달성한 6인 중 한 명
2009년부터 4년 연속 AL 골드글러브 기록도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좌완투수 마크 벌리(35)는 지난 20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7이닝 무실점으로 팀의 5-0 완봉승을 이끌었다. 올 시즌 4차례 선발로 등판해 4승을 따낸 벌리는 시즌 방어율을 0.64로 끌어내려 두 부문 모두 메이저리그 1위를 질주하고 있다. 부상 없이 현재 추세가 이어진다면 14년 연속 10승 이상과 200이닝 이상 투구는 떼어 놓은 당상이다. 직구 구속은 시속 86마일(138km)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타자들의 허점을 파고드는 두뇌 피칭이 일품인 벌리는 SK 와이번스 성준 코치의 현역 시절 투구 스타일과 매우 흡사하다. 불같은 강속구를 앞세운 투수들이 점점 득세하는 가운데 ‘느림의 미학’을 앞세워 대망의 200승 고지에 10승만을 남겨 놓은 벌리의 야구 인생을 살펴본다.


● 야구 재능이 없는 오뚝이

대부분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은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재능을 뽐냈다. 미국에서 태어난 이들은 야구뿐만 아니라 풋볼, 농구, 육상 등 다른 종목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지닌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벌리는 예외다.

1979년 미주리주 세인트찰스에서 태어난 벌리는 프랜시스 하월 노스 하이스쿨에서 야구를 했다. 하지만 10학년 때 야구부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실력이 없다는 이유였다. 2년제인 제퍼슨 주니어 칼리지로 진학하고서야 다시 정식으로 야구를 한 벌리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시카고 화이트삭스로부터 38라운드에 지명을 받았다. 그보다 앞서 선택된 선수는 무려 1138명이나 됐다.

키 189cm의 좋은 신체 조건에 좌완투수라는 강점을 지닌 벌리는 마이너리그에서 빠른 속도로 실력을 연마했다. 1999년 싱글A에서 7승4패(방어율 4.10)를 기록한 벌리는 이듬해 더블A로 승격해 8승4패(방어율 2.28)의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특히 119이닝을 던지는 동안 볼넷을 17개밖에 허용하지 않았을 정도로 놀라운 제구력을 뽐냈다. 2000년 마이너리그 올스타전인 ‘퓨처스 게임’에도 출전해 승리투수가 된 그는 마이너리그에서 고작 36경기에 나선 뒤 메이저리그로 승격되는 신화를 이뤄냈다.


● 이닝이터 선발투수

최대한 많은 이닝을 소화해 내는 것은 선발투수의 최고 덕목이다.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 2001년부터 벌리는 화이트삭스의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해 16승8패(방어율 3.29)의 놀라운 성적을 올렸다. 5월 중순부터 24.2연속이닝 무실점 행진을 이어가며 센세이션을 일으키더니 완봉승 2번을 포함해 4번이나 완투를 하며 무려 221.1이닝이나 소화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200이닝 이상 투구에 최소 10승 이상 기록은 지난 시즌까지 무려 13년이나 계속됐다. 가장 많은 승리를 따낸 것은 2001년으로 19승(12패)이나 수확했다. 2004년에는 아메리칸리그 최다인 245.1이닝이나 던졌다. 투구이닝과 승리가 가장 적었던 해는 2007년으로 201이닝을 던져 10승9패(방어율 3.63)를 기록했다. 지난 20일 인디언스전까지 개인통산 2910.2이닝을 던진 벌리는 현역 선수 중 최고의 고무팔 투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88년 만의 우승

뉴욕, LA와 더불어 미국의 3대 도시로 꼽히는 시카고는 월드시리즈 우승과 별 인연이 없다. 시카고 컵스는 1907년과 1908년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 이후 105년째 무관이다. 화이트삭스도 1906년과 1917년에 챔피언에 등극한 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런 시카고에서 무려 88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2005년 화이트삭스는 99승을 거두며 아메리칸리그 승률 1위를 차지했다. 벌리도 정규시즌 리그 1위인 236.2이닝을 던지며 16승8패(방어율 3.12)의 뛰어난 성적을 올려 팀의 상승세를 주도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화이트삭스의 기세는 대단했다. 호세 콘트레라스에 이어 2선발로 마운드를 책임진 벌리는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디비전시리즈 2차전과 LA 에인절스와의 리그챔피언십시리즈 2차전에서 모두 승리 투수가 됐다. 특히 에인절스전에서는 9이닝 1실점으로 완투승을 거뒀다.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치른 월드시리즈에서 역시 2차전에 나선 벌리는 승패를 기록하지 못했지만 3차전에서는 마무리투수로 나와 세이브를 기록했다. 리그챔피언십시리즈에서만 1패를 당했을 뿐 투타의 조화를 이룬 화이트삭스는 11승1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의 꿈을 이뤘다.


● 미스터 퍼펙트

모든 투수들의 꿈은 퍼펙트게임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9이닝 동안 27명의 타자를 모두 잡아내는 퍼펙트게임은 지금까지 단 23차례에 불과했다. 그 중의 한 명이 바로 벌리다. 반면 안타를 단 한 개도 허용하지 않는 노히터는 282차례 나왔다. 그 명단에도 벌리의 이름은 들어있다. 퍼펙트게임과 노히터를 모두 달성한 선수는 사이 영, 애디 조스, 짐 버닝, 샌디 쿠팩스, 랜디 존슨에 이어 벌리까지 총 6명뿐이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고 난 뒤 2006년은 벌리에게 최악의 시즌이었다. 12승13패로 승률 5할에 처음으로 미치지 못했고, 방어율도 4.99나 됐다. 하지만 2007년 4월 19일 홈구장 US셀룰러필드에서 벌리는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상대는 막강 타선의 텍사스 레인저스였지만 5회초 새미 소사가 볼넷으로 나간 것이 이날 유일한 출루였다. 그나마 소사를 견제구로 잡아내 단 27명의 타자만을 상대하고 경기를 마친 완벽에 가까운 경기였다. 아메리칸리그에서 근 5년 만에 나온 노히터였다.

2009년 7월 24일 탬파베이 레이스와의 홈경기에 등판한 벌리는 메이저리그 통산 18번째 퍼펙트게임의 주인공이 됐다. 관중들이 술렁이기 시작한 9회초 게이브 캐플러가 친 홈런성 타구를 드웨인 와이즈가 잡아내는 도움이 벌리의 대기록 수립에 기여했다. 마지막 타자 제이슨 바렛을 유격수 땅볼로 잡아내며 27번째 아웃 카운트를 기록하자 US셀룰러필드는 벌리의 이름을 연호하는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 제 5의 내야수

골드글러브는 각 포지션별로 최고의 수비력을 뽐낸 선수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컨트롤의 마법사’로 유명한 그렉 매덕스는 무려 18번이나 이 상의 주인공이 됐다. 투구를 한 후 뛰어난 순발력을 발휘해 5번째 내야수로서 눈부신 활약을 펼쳐 이 상을 거의 독식하다시피 한 것이다.

매덕스와 마찬가지로 파워피처가 아닌 벌리도 수비력에서 남다른 실력을 보여 2009년부터 4년 연속 아메리칸리그 골드글러브를 휩쓸었다. 2010년 4월 6일 열린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경기에서 벌리는 통산 8번째로 개막전 선발로 마운드에 올랐다. 인디언스의 3번타자로 나온 추신수를 상대로 삼진 2개를 잡는 등 3타수 무안타로 완벽하게 봉쇄한 벌리는 7이닝 동안 3피안타 무실점으로 역투하며 팀의 6-0 승리를 이끌었다. 이날 경기의 하이라이트는 5회초 수비에서 나왔다. 1사 후 루 마슨이 친 원바운드 타구가 벌리의 발을 맞고 1루 파울 라인 바깥쪽으로 향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전력질주한 벌리는 중심을 잃고 넘어지면서 가랑이 사이로 공을 1루수에게 토스해 간발의 차이로 아웃시키는 묘기를 펼쳤다.

이날부터 ESPN은 애널리스트 존 크룩의 제안을 받아들여 한 동안 베이스볼 투나잇에서 ‘벌리-미터’라는 코너를 방영했다. 그날 벌어진 진기명기를 보여준 후 벌리의 환상적인 플레이와 비교해 어느 것이 더 뛰어났느냐를 견주는 것이었다.

스포츠동아 미국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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