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혜 “사격 포기했던 1년2개월…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입력 2014-09-15 0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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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혜가 12일(한국시간) 스페인 그라나다 후안 카를로스 1세 올림픽사격장에서 열린 제51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 여자 10m 공기권총에서 우승한 뒤 금메달을 들어 보이고 있다(사진 위). 작은 사진은 정지혜의 오른손 검지에 새겨진 호랑이 문신. 그라나다(스페인)|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트위터@setupman11

■ 알바생에서 세계사격선수권 여10m 공기권총 챔프로…정지혜의 드라마같은 우승 스토리

잘 나가던 사격 인생…2011년 대상포진 시련
결국 사격 포기하고 스포츠매장서 아르바이트
14개월만에 현역 복귀…올해 다시 태극마크
“알바하던 그때가 나에겐 힐링의 시간이었죠
AG에서는 女10m 공기 권총 2관왕 쏠겁니다”

‘그라나다의 기적’이었다.

12일(한국시간) 스페인 그라나다 후안 카를로스 1세 올림픽사격장에서 열린 제51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 여자 10m 공기권총 결선. 정지혜(25·부산시청)가 본선 8위(382점)로 결선(8명)행 막차를 탔을 때까지만 해도, 한국사격 관계자들은 “일단 올림픽 쿼터만 땄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이 종목 세계선수권에는 2016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출전권 6장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6등을 훌쩍 뛰어넘어 깜짝 금메달이 탄생했다. 정지혜는 197.4점으로 2위 올레나 코체브이크(우크라이나·196.7점)를 제쳤다. 한국이 세계선수권 여자 10m 공기권총에서 정상에 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4년에 한번씩 열리는 세계사격선수권은 올림픽 다음으로 비중 있는 대회다. 출전선수의 숫자는 무려 2000명 이상으로, 올림픽을 능가한다. 세계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정지혜는 일순간에 한국사격의 별로 떠올랐다. 특히 한동안 사격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사연은 ‘그라나다의 기적’을 더 빛나게 한다.


● 탄탄대로 달리던 사격선수에게 엄습한 병마

정지혜는 인천 문학초등학교 시절 단거리 육상선수였다. 인천여중으로 진학할 때도 체육특기생 신분이었다. 그러나 중학교 입학 직후 아킬레스건을 다쳤고, 육상을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운동을 그만두면서 인천 관교여중으로 전학했는데, 그곳에서 운명처럼 사격을 만났다. 남다른 운동신경 덕분에 지도자의 눈에 띄었다. 사격 입문 2년 만인 중학교 3학년 때 소년체전에서 입상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인천 옥련여고 1학년 여름에는 주니어대표로 선발되며 유망주로 인정받았다. 실업 2년차이던 2009년에는 성인대표팀에도 발탁되는 등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러나 2011년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대상포진이 발병해 만성근육통과 위경련 등의 합병증이 엄습했다. 몸이 쉽게 피곤해져서 훈련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팀에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결국 그해 운동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그 땐 정말 당황스러웠어요. ‘사격만 보고 꿈을 좇아 10년을 달려왔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어요. 큰 좌절감이 밀려왔죠.”


● 사격선수에서 스포츠브랜드매장 아르바이트생으로!

몸이 나을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어디든 달려갔다. 양방뿐만 아니라 침, 뜸 등 한방의 힘도 빌렸다. 난생 처음 사격 이외의 다른 일도 해봤다. 스포츠브랜드 N사의 매장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취직했다. 서글서글한 성격 덕분에 나름 영업에도 능력이 있었다. 지금도 운동화를 보면, 제품 고유번호를 통해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된 직원이었다.

그러나 문득문득 공허함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1년 2개월을 쉬는 동안 단 한번도 총을 잡은 적이 없었어요. 혹시나 미련이 생길까봐서요. 가끔은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격 없이는 허전하더라고요. 그러던 찰나에….” 평소 친한 언니·동생 사이로 지내던 여자권총선수 김병희(32)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시 한번 사격을 해보지 않을래?” 가슴이 뛰었다. 결국 2012년 5월 서울시청에 입단하면서 꿈에 그리던 사격장으로 돌아왔다.


● 1년 2개월 만에 복귀…순수한 아이의 마음으로 총을 쏘다!

다시 총을 잡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공백기가 무색할 만큼 총이 잘 맞았다. “흑백에서 컬러텔레비전으로 바꾼 느낌이었어요. 뭔가 생동감이 생겼죠. 그 전엔 총을 잘 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점수에 대한 욕심이 많았어요. 하지만 돌아온 뒤부터는 순수한 아이의 마음으로 총을 쏩니다. 처음처럼 즐기면서요. 지금도 총을 잡으면 행복합니다.” 복귀한 지 두 달 만인 2012년 6월 한화회장배 사격대회에선 서울시청 소속으로 출전해 단체전 비공식 세계기록(1165점) 작성에도 힘을 보탰다. 그리고 올해 6차까지 진행된 치열한 대표선발전을 통과해 5년 만에 다시 태극마크를 달았다. “운동을 그만둔 1년 2개월이 제게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것 같아요. 힐링의 시간이었다고 할까요?”


● 호랑이의 기운을 타고 난 명사수

정지혜의 오른쪽 검지에는 호랑이 얼굴 모양의 문신이 있다. 운동을 쉬던 시절 한 스님의 권유로 새긴 것이다. “제 태몽이 호랑이 꿈이었대요. 산만한 호랑이가 어머니께 다가와 어머니의 얼굴을 막 핥더라는 거예요. 스님께서 ‘검지를 쓰는 직업이니, 좋은 기운이 퍼지도록 검지에 호랑이 문신을 하면 어떻겠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 일이 잘 풀리네요. 진짜 ‘호랑이 기운’이란 게 있나봐요.”

정지혜가 시니어선수로서 국제대회에 출전한 것은 2010년 3월 호주 시드니월드컵 이후 이번이 4년 만에 처음이다. 그러나 서바이벌 방식으로 진행된 결선에서도 전혀 위축됨 없이 ‘맹수의 왕’ 호랑이처럼 위풍당당했다. 결선 직전 ‘권총황제’ 진종오(35·kt)가 “다른 선수들 다 떨고 있어. 넌 실수만 안하면 되는 거야”라고 힘을 준 것도 큰 도움이 됐다.


● 인천 옥련국제사격장…꿈을 키운 곳에서 꿈을 이루나?

14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금의환향한 정지혜는 19일 개막하는 2014인천아시안게임에서 또 한번의 돌풍을 예고하고 있다. 목표는 여자 10m 공기권총 개인·단체전 2관왕이다. 인천아시안게임 사격 경기는 옥련국제사격장에서 열린다. 정지혜는 인천이 고향으로, 초·중·고교를 모두 인천에서 다녔다. 옥련사격장은 중·고교 시절 그녀가 매일매일 총과 씨름하던 곳이다. “그 때는 총을 너무 잘 쏘고 싶어서 훈련을 많이 했어요. 새벽에 일어나 남들 등교하기 1시간30분 전에 사격장에 가서, 밤 12시 지나 돌아오는 날도 있었습니다.”

아침 이슬을 맞으며 들어가 밤별을 보며 나오던 곳. 사격선수로서 꿈을 키운 바로 그 무대에서 이제 꿈을 이룰 일만 남았다. 인천아시안게임 여자 10m 공기권총 본선·결선은 20일 열린다.

그라나다(스페인)|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setupman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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