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의 아이러브 스테이지] 온 국민이 일어나는 그날까지 ‘불멸의 명성황후’

입력 2015-08-07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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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대사들을 상대로 파티를 열고 있는 명성황후(오른쪽·신영숙 분)와 고종(박완 분). 올해 20주년을 맞은 뮤지컬 명성황후는 한국 뮤지컬을 대표하는 작품답게 뛰어난 음악, 화려한 무대, 묵직한 메시지와 배우들의 명연으로 관객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사진제공|에이콤인터내셔날

■ 20주년 맞은 뮤지컬 ‘명성황후’

새로운 넘버 추가·고종의 고뇌 등 리뉴얼
신영숙·김법래 열연…또 다른 20년 기대

일본인 자객들의 칼이 여인의 몸에 사정없이 꽂힌다. 여인은 고통스러워하며, 관객들을 향해 쓰러진다. 여인의 마지막 몸부림이 멈추자 자객들의 우두머리인 미우라가 그녀를 향해 승자의 발걸음으로 다가간다. 숨이 멎은 여인의 머리끄덩이를 움켜쥐고는 거칠게 치켜 올린다. 관객의 눈에 죽은 여인의 얼굴이 들어온다. 초침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흐른다.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보여주듯 머리를 들어올리고 있던 미우라가 툭 떨구고는 한 마디 한다.

“태워라.”

뮤지컬 명성황후는 무겁다. 두 팔로는 어림이 없어 등에 지어도 보고, 머리에 이어도 보지만 무겁다. 명성황후의 저 유명한 마지막 넘버 ‘백성들아 일어나라’에서조차 꾹꾹 참았던 눈물이 막이 내려간 뒤에야 펑 터지고 말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리는 순간 4층까지 꽉 들어찬 관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2000여 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모두 ‘일어나’ 있었다. 젠장, 우리 모두 한 마음, 한 생각이었던 거다.

그랬다. 우리들이 이렇게 일어설 수 있는 한, 이 민족과 이 나라는 너희들에게 지지 않을 것이다. 잊지 않을 것이다.

9월10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는 뮤지컬 명성황후는 올해 20주년을 맞았다. 1995년 명성황후 시해 100주기를 기념해 한국 공연계의 거장이자 풍운아인 윤호진이 10년의 도전과 노력으로 빚어낸 결과물이 명성황후였다. 20년 전, 한국 공연계는 어떻게 이런 대작을 만들 수 있었을까. 이런 완성도 높은 음악을, 감동적인 스토리를, 두 개의 층으로 나뉘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무대를 어떻게 만들고 구현할 수 있었을까. 명성황후 덕에 우리들은 지난 20년간 ‘오페라의 유령’, ‘노트르담 드 파리’, ‘레미제라블’ 앞에서도 당당히 어깨를 펼 수 있었다.


● 새로워진 명성황후…신영숙·김법래 연기에 소름이 쫙

20주년 공연을 맞아 제작사인 에이콤인터내셔날은 단단히 칼을 갈고 나왔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꾼다’는 의욕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음악적으로는 새로운 넘버를 추가하거나 편곡했다. 이해하기 어려웠던 용어들을 쉽게 바꿨고 극의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장면들의 순서와 시간을 재배열했다. 명성황후를 지키는 호위무사 홍계훈의 비중을 높여 애틋한 로맨스를 살렸다. 우유부단하기만 했던 고종은 고뇌하는 대한제국의 황제로 거듭났다.

여기에 배우들. ‘영원한 명성황후’ 이태원의 뒤를 이은 신영숙의 연기는 완벽했다. 신영숙이 그은 선은 너무나도 정확하고 뚜렷해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었다. 특히 2막에서 쏟아내는 에너지는 관객의 허리를 의자 등에 바짝 붙이게 만들 정도로 박력이 있었다.

신영숙 못지않은 대어는 미우라 역의 김법래였다. 명성황후 시해작전인 ‘여우사냥’을 이끄는 미우라. 김법래의 미우라가 뿜어내는 독기는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강했다. 정의와 도리, 인간의 숭고함과 희생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힘’. 그 힘의 숭상과 정당화에 대한 미우라의 논리는 반감에 눈을 부라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수긍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20주년을 맞은 명성황후는 ‘또 다른 20년’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이 자랑스러운 작품을 오래오래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선의, 대한민국의 온 국민이 ‘일어나는’ 그 날까지, 명성황후를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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