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열음의 ‘모던 타임즈’는 ‘열음 타임즈’였다

입력 2016-02-21 16: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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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손열음. 사진제공|크레디아

손열음의 모든 것을 보여준 앨범은 아니었다. 하지만 손열음이 살아온 삶의 한 토막을,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인생의 순간을 확대하여 충분한 시간을 들여 들려주는 앨범이다.

손열음의 새 앨범 ‘모던 타임즈’는 모던한 시기의 작곡가들의 작품들로 구성했다. 딱 집어 말하면 1910년대에 집중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시대다. 인간이 쌓아올린 모든 것이 무너지고 궤멸되고 새로운 문명의 빛을 찾아 헤매던 시기.

‘모던 타임즈’의 포연 자욱한 문은 베르크의 피아노소나타 작품1이 연다. 1919년 작품으로 단 한 개의 악장으로 된 소나타다. 끊임없이 사색해 들어가는 음악이다. 이 ‘단 한 개의 악장’만으로도 손열음이 얼마나 사색적인 연주자인가를 가늠할 수 있다. 한 음 한 음이 비틀거리면서도 쉼 없이, 완고한 얼굴을 한 채 심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연주다.

프로코피에프의 ‘토카타 D단조’ 작품11은 왼손과 오른손이 ‘D음’을 반복해서 두드리며 말문을 뗀다. 기교와 박력이 넘치는 작품으로 손 빠른 피아니스트들이 화려한 기교를 과시할 때 자주 무대에 올리는 곡으로도 유명하다.

1916년 11월, 페트로그라드음악원에서 작곡가 자신의 연주로 초연됐다.

이 곡에서는 ‘열 개의 손가락을 스무 개처럼 사용하는’ 손열음의 날아다니는 기교를 감상할 수 있다. 이런 연주를 듣고 있으면 ‘피아노는 결국 타악기’라는 본질에 수긍하게 된다. ‘치는 게’아니라 ‘두드린’다.

손열음의 연주는 명료하다. 어떤 소리도 뭉개지는 법이 없다. 모호한 안개조차 입자가 보이는 듯한 연주다. 손열음의 연주에서는 적어도 ‘좋은 게 좋은 거지’ 따위의 뭣 같은 발상은 찾아볼 수 없다.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 중 3개의 악장’은 1921년도에 작곡됐다. 발레곡 페트루슈카를 발표한 스트라빈스키는 10년 후 친구이자 거장 피아니스트인 아르투르 루빈시타인의 요청을 받아 3개의 에피소드를 골라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했다. 가뜩이나 다채로운 오케스트라 버전 원곡의 색채감을 피아노 건반만으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연주자의 능력, 특히 색감의 표현력이 뛰어나야 한다.

피아노의 독자적인 표현도 좋지만 ‘이 음은 오케스트라 어느 악기의 소리를 묘사한 것일까’를 생각하며 들으면 더욱 재미있는 곡이다.

손열음은 팔레트같은 표현력을 지닌 피아니스트이다. 일단은 화려하고 선명하다. 고화질 TV 화면같은 해상력을 가졌다. 그런데 이런 소리는 내고 싶을 때만 꺼낸다. 실은 음울하고, 칙칙하고, 침잠해 들어가는 소리도 갖고 있다. 정말이냐고? 이미 첫 곡 베르크의 소나타에서 들려주었다.

피아노 앞에 앉은 손열음의 얼굴표정이 엿보이는 듯한 연주라 더욱 흥미로웠다. ‘이쯤에서 이런 얼굴을 하고 있겠지’ 싶어 피식 웃어가며 들었다. 때때로 손열음은 굉장히 개구쟁이 같은 얼굴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는 어둠 속을 노려보는 꽤 앙칼지면서도 섹시한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네 번째 곡은 라벨 ‘쿠프랭의 무덤’. 라벨이 쓴 피아노 솔로를 위한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1919년에 초연되었다. 프렐류드, 푸가, 이탈리아의 무곡인 포를랑, 전원적인 성격이 우러나는 무곡 리고동, 미뉴엣 등 고전적인 무곡과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하나의 곡들이 개성적이지만 딱히 ‘무덤’을 연상하게 하지는 않는다. 무덤이란 단어가 갖고 있는 어두움, 음울함, 습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죽은 이들에 대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들에 대한 쓸쓸한 회상에 가깝다.

손열음의 터치도 섬세하고 아름답다. 마지막 곡인 행진곡풍의 토카타를 제외하면 마치 건반을 깨지기 쉬운 물건처럼 소중하게 매만진다.

마지막 곡은 라벨의 ‘라 발스’다. 1920년에 작곡되었다. 원래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작곡했고 나중에 피아노곡으로 편곡했다

빈 왈츠에 대한 존경과 예찬을 담은 작품이라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왈츠’라고 부르고 싶다. 꽤 길다. 손열음의 연주로는 12분 55초가 나온다.

라벨스러운 몽환적인 분위기가 자욱한데 신경질적인 강약의 대비가 묘하게 어울린다.

손열음의 앨범 ‘모던 타임즈’를 듣는 시간이 행복했다. 손열음의 ‘모던 타임즈’는 우리에겐 ‘열음 타임즈’였다.

손열음은 2월 27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첫 리사이틀 이후 3년 만에 두 번째 리사이틀을 연다. 물론 ‘모던 타임스’가 콘셉트이다. 100년 전의 음악적 포연으로 자욱한 앨범에서 뛰쳐나온 손열음의 살아 날뛰는 연주를 듣고 싶다면 놓칠 수 없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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