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배합은 투수와 포수의 하모니다. 누군가는 ‘볼 배합은 허상’이라고 평가절하를 내리지만 좋은 포수가 우승을 만드는 것도 현실이다. 스포츠동아DB
Q : 볼 배합이란 단어는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정작 그 깊이에 대해선 모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일반 팬들 역시 궁금해 하는 내용인데요.
A : 볼 배합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물론 모두가 틀린 답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저는 ‘볼 배합에 정답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그 속이 깊기 때문이죠. 먼저 볼 배합에 대한 기본 갈래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크게 3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는데요. 투수 중심 배합, 상황 중심 배합 그리고 타자 중심 배합입니다. 투수를 중심으로 놓고 봤을 땐 기교파와 정통파로 나눌 수 있겠네요. 기교파 투수의 경우는 포수가 변화구와 제구력에 바탕을 두고 타자를 맞춰 잡는 패턴으로 볼 배합을 가져갑니다. 반대인 정통파의 경우엔 힘으로 밀어붙이는 볼 배합이 필요하죠. 상황에 따라서도 볼 배합은 달라집니다. 상황 중심 배합은 실례를 들어보죠. 주자 1루 시 병살을 유도하는 상황, 1루가 비어있는 상황, 주자 3루 시 희생플라이를 허용해선 안 되는 상황 등 입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판단해 볼 배합을 결정해야합니다. 오늘은 타자를 중심으로 한 볼 배합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
Q : 그렇다면 타자 중심 배합은 어떻게 이뤄지나요?
A : 이는 기본적으로 상대타자 유형을 파악하는 작업에서 출발합니다. 장타자/단타자, 당겨치는 타자/밀어치는 타자, 직구를 잘 치는 타자/변화구에 잘 대응하는 타자, 이와 같은 기본적인 내용들을 미리 숙지하고 있어야겠죠. 다음은 타자의 자세, 배트 그립 모양, 배트를 들고 있는 각도, 스트라이드 시 발의 위치, 몸의 중심 이동 분석 등입니다. 이러한 부분들을 사전에 정확하게 숙지하고 있어야만 순간적인 분석을 통해 효율적인 볼 배합이 가능합니다. 그 다음이 파울 스윙에서의 결과 분석입니다. 같은 파울이라고 해도 타구방향에 따라서 다음 볼 배합에 대한 결정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Q : 파울타구에 따른 볼 배합 변화는 어떻게 이뤄지는지 궁금합니다.
A : 오른손 타자를 기준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당겨쳐서 3루코치 박스 방향으로 라인드라이브성 파울타구가 나온다면 타자의 타이밍이 조금 빠르다는 뜻입니다. 이럴 땐 종으로 떨어지는 변화구로 상대 타이밍을 뺏어낼 수 있습니다. 만약 1루코치 박스 방향으로 직선타구가 나온다면 타자의 타이밍이 다소 늦다는 증거죠. 이 경우엔 가급적 몸쪽으로 직구를 붙이면서 승부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다음으로 파울타구가 백네트 방향으로 간다면 타이밍이 맞아 들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땐 방금 던진 볼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포수의 사인을 보고있는 박희수. 스포츠동아DB
Q : 그런데 볼 배합에 앞서 타자가 어떤 구종, 어느 코스를 노리는지 먼저 파악해야할 텐데요. 그 노림수는 어떻게 알아챌 수 있을까요.
A : 앞서 몸의 중심 이동을 이야기했는데요. 경기를 하다 보면 타자가 도대체 무엇을 노리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타자 속을 매번 알아차릴 수는 없는 법이죠. 이럴 땐 의도적인 볼 배합을 통해 파악할 수 있습니다. 몸쪽 깊숙이 직구를 붙이거나 타자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변화구를 던진 뒤 타자의 웨이팅 모습을 통해 노림수를 예측하는 방법이죠. 만약 타자가 몸쪽 유인구성 직구에 반응해 팔이 앞으로 나온다면 직구 타격의도가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직구 타이밍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증거죠. 이럴 땐 역으로 변화구를 던지면서 타이밍을 뺏어야합니다. 반대로 외곽 변화구에 타자의 중심이 앞으로 쏠리면서 팔이 따라온다면 직구 타이밍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변화구 비중을 높이는 게 유리합니다.
Q : 그렇다면 이와 같은 볼 배합에 정통한 포수가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KBO리그 원년부터 수많은 포수들을 보셨을 텐데요.
A : 아무래도 볼 배합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포수는 박경완(SK 배터리코치)이 아닌가 합니다. 박 코치 현역시절을 회상해보니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데이터에 특징이 없었다는 겁니다. 포수는 일반적으로 볼 배합에 관한 특정 데이터가 쌓이기 마련입니다. 어느 카운트엔 어느 볼을 많이 유도했는지 드러나게 되죠. 그런데 박 코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하나. 앞서 언급한 타자의 유형과 자세, 성향, 타석에서의 움직임 등을 모두 파악하면서 볼 배합을 했던 포수였습니다. 쌍방울과 SK에서 제자로도 데리고 있었지만, 박 코치 속은 저도 모르겠더군요. 적군은 물론 아군도 속인 셈이죠. 또 한 명은 진갑용(소프트뱅크 코치)입니다. 상대타자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빠르게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만큼 머리가 뛰어난 친구였습니다. 둘 모두 소속팀의 수차례 우승을 괜히 이끈 것이 아닙니다.
선수 시절 박경완. 사진제공|SK 와이번스
정리 | 고봉준 기자 shutout@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