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이란전을 앞둔 김영권에게 특명이 떨어졌다. 기존 포지션인 주전 센터백과 더불어 주장 완장까지 주어지면서 사명감과 책임감이 한층 더해졌다. 4년 전 이란을 상대로 치욕을 맛봤던 김영권의 두 눈이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다. 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4년전 흘렸던 피눈물, 비수 꽂아주마”
한국축구대표팀 신태용(47) 감독이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에 김영권(27·광저우 에버그란데)이 응답할 수 있을까. 2018 러시아월드컵 본선 직행이라는 목표 아래 집결한 축구대표팀이 새로운 주장 김영권을 필두로 ‘이란 격파(8월3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의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 있다. 신 감독이 김영권을 ‘뉴 캡틴’으로 선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속엔 몇 가지 사연이 얽히고설켜 있다.
축구대표팀 김영권. 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 주장 겸 핵심 수비수, 무게감 더해 러시아행 이끈다
주장 선임은 이번 대표팀에 주어진 또 하나의 과제였다. 전임 울리 슈틸리케 감독 체제에서 줄곧 완장을 찼던 기성용(28·스완지시티)이 무릎 부상으로 남은 최종예선 2경기 출전이 어려워짐에 따라 새 사령관이 필요했다.
조기소집을 통해 모인 대표팀은 그간 ‘맏형’ 이동국(38·전북 현대)에게 임시주장을 맡겨 훈련을 진행했다. 실제로 이동국은 3년간의 대표팀 공백이 무색할 정도로 그라운드 안팎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며 후배들을 이끌었다. 그러나 임시주장은 어디까지나 훈련장에서의 리더 역할이었다. 실전에서 선수단을 아우를 수 있는 주장이 필요했고, 대표팀 전체 논의 끝에 김영권이 새 리더로 낙점됐다.
신 감독이 ‘주장 김영권’이라는 깜짝 카드를 꺼내든 건 수비라인 강화가 주목적이다. 그간 대표팀은 최종예선 8경기에서 잦은 실점으로 애를 먹었다. A조 2위인 한국은 5위 카타르와 함께 가장 많은 10골을 허용했다. 6개국 가운데 가장 많은 11골을 넣고도 어려운 레이스를 펼치고 있는 이유가 바로 들쑥날쑥한 수비력 때문이다. 따라서 신 감독은 수비진의 중추 역할을 맡는 김영권에게 주장이라는 책임감까지 더해 수비라인 안정화를 꾀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지난 2013년 이란전 당시 김영권. 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 악몽과 중국화 논란, 동시에 잠재운다
또 다른 의도가 숨어 있다. 바로 설욕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김영권은 4년 전 큰 아픔을 겪었다. 2013년 6월 18일 울산문수경기장에서 열린 2014 브라질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A조 이란과 최종전에서 후반 15분 수비 진영에서 단 한번의 볼 터치 실수로 0-1 패배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날 패배는 김영권의 가슴에 평생 지울 수 없는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당시 한국은 우즈베키스탄보다 골득실차에서 앞서 천만다행으로 브라질행 티켓을 따내긴 했지만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경기 후 이란선수단의 조롱과 카를로스 케이로스 감독의 ‘주먹감자’ 세리머니를 받는 등 굴욕을 피할 수 없었다. 본선 진출 기념행사도 초상집 분위기 속에 치러졌고, 치명적인 실수를 범한 김영권은 경기장 한 편에서 통한의 눈물을 닦아내야 했다. 김영권은 4년 만에 악몽을 지울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김영권이 이를 악문 데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대표팀 분위기를 갉아먹었던 ‘중국화 논란’을 잠재워야한다. 김영권을 비롯한 중국 슈퍼리거들은 최근 대표팀 경기에서 수비라인을 책임졌는데, 결과가 신통치 않자 중국에서 뛰고 있는 수비수들을 향한 질타가 쏟아지는 등 논란이 이어졌다. 이러한 잡음을 잘 알고 있는 김영권은 “중국화 논란은 선수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실력을 통해 ‘중국화가 답이다‘라는 말이 나오게 하겠다”며 각오를 전했다.
고봉준 기자 shutout@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