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베이스볼] 대만에서 새벽기도 했던 구 총재

입력 2018-01-08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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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능 전 KBO 총재. 스포츠동아DB

기자가 구본능 전 KBO총재와 처음 단둘이 대화를 한 것은 2013년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1라운드가 열린 대만 타이중 인터콘티넨탈구장이었다. 경기 중 구 총재는 관람석에 좀처럼 앉지 못했다. 1차전 네덜란드와 경기에서 결국 대표팀이 패하자 야구장을 떠나지 못하고 멍 하니 그라운드만 바라보고 있었다. 기자가 기사를 다 송고할 때 까지 구 총재는 텅 빈 야구장에 서 있었다. 통역을 맡은 직원만 어쩔 줄 몰라 몇 발짝 뒤에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구 총재는 “대표팀은 열심히 잘 싸웠는데 부족한 사람이 커미셔너를 맡아서…. 나 때문에 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내일 아침부터 새벽에 일어나 생수 올리고 치성을 드려야겠다.”고 했다. 실제로 대회가 끝날 때까지 구 총재는 매일 새벽 호텔 방에서 생수를 떠 놓고 정성껏 대표팀의 승리를 기도했다.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거부인 노신사는 대회기간 현지 유명 한국 갈비구이 식당에서 자비로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에게 고기를 샀다. “많이 드시라”며 최고급 등심을 주문하면서 정작 자신은 한 쪽 구석에 앉아 삼겹살을 손수 구워 소주 한잔 곁들이는 모습도 잊기 힘들다.

지난 2013 WBC에서 네덜란드에 패한 한국.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구 총재는 종종 잠실구장으로 친구들을 초대했다. 대자산가의 친구라 모두 힘 있는 양반들이라 생각되겠지만 검소한 옷차림에 인자한 인상의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구 총재는 ‘생수’를 종이컵에 따라 건배를 하고 마시는 친구들이 있으면 직접 향기를 맡아 본 후 ‘생수’병을 뺏어 가기도 했다. 지인들과 허름한 식당에서 식사하기를 즐기고 사우나도 시설이 낡은 오래된 동네 목욕탕이 단골이다.

3일 KBO를 떠난 구 총재는 다시 희성그룹 회장인 본업에 전념한다. 그러나 한국프로야구 발전을 이끈 공로는 영원히 그라운드에 남는다. 구 총재 재임기간 10구단 리그가 완성됐고 신축구장이 연이어 문을 열었다. 기업계의 큰 어른 중 한명으로 각 구단의 이해관계를 잘 조율한 것도 10개 구단 리그 안착에 큰 힘이었다.

공과를 떠나 구 총재는 소탈하고 솔직한 모습으로 팬들과 함께했다. 권위적이거나 자신을 특별하게 내세우는 모습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팬들이 스스럼없이 다가와 기념촬영을 하고 사인도 받았다. 야구장 근처를 수행원도 없이 돌아다니다 팬들에게 먼저 인사하는 장면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역대 KBO 총재 중 팬들에게 가장 사인을 많이 해준 주인공. 이제 총재직에서 내려왔지만 노신사들과 함께 야구장에서 흥겹게 응원하는 모습을 더 자주 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나마 아쉬움이 덜하다.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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